[아주 특별한 인터뷰]참여정부 시대의 풍운아 유시민 의원

2008 06/03   뉴스메이커 777호

“국정원·검찰보다 보수신문이 무서워요”


16·17대 국회의원이자 전 보건복지부 장관인 유시민 의원(49). 참여정부의 핵심 멤버였던 그가 6년간의 정치생활을 마감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되돌아간다. 18대 총선에서 보수적 색채가 짙어 ‘대구의 강남’으로 불리는 수성구에 출마해 낙선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32.6%를 득표하여 ‘의미 있는 낙선’이라는 평가를 들으며 저력을 과시했다.
정치권에서 가장 튀는 인물로 대중적 인지도가 매우 높았고, 한때 ‘노무현의 경호실장’으로 불리기도 한 그는 앞으로 어떤 삶을 꾸려갈까. 5월 19일 진행한 인터뷰는 뜨거운 열정으로 여의도 정가를 누볐던 이 시대의 풍운아 유시민 의원의 정치 인생을 뒤돌아보고 향후 인생 궤도를 그려보려는 시도였다.


형형색색의 만개한 꽃들과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초록색 잎사귀들이 눈길을 사로잡는 봄날 오후. 서울 종로구 역사박물관에 있는 카페 ‘콩豆(두)이야기’의 야외 테라스는 인접한 경희궁과 맞닿아 운치를 더했다. 테라스에서 내려다보이는 잔디밭엔 노랑나비와 흰나비가 날갯짓을 하며 춘흥에 겨워한다. 작은 얼굴에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인 유시민 의원은 테라스와 묘한 조화를 이루며 풍경 속에 녹아 있다. 다소 지친 기색이었지만, 모처럼 되찾을 여유와 휴식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안온함이 느껴졌다. 그는 “정치인에서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2학기부터 경북대에서 시간강사로 교양경제학을 강의할 예정이에요. 위생검역이나 대운하, 민영의료보험, 일자리 문제 등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주제를 12개 정도 뽑아 강의할 생각이죠. 그리고 돈 벌기 위해 책도 쓰고 강연도 해야 해요. 장관 한 번 하면 연금을 준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런 거 전혀 없어요. 또 국회의원은 65세 넘어 살기 힘들면 헌정회(역대 국회의원 모임)에서 월 100만 원씩 준다고 하는데, 국회의원까지 한 사람이 그걸 받아서 사는 건 좀 그렇고, 나이로도 한참 먼 얘기잖아요. 가족을 부양하려면 저도 열심히 밥벌이해야죠(웃음).”

2002년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해 이듬해 4월 제16대 개혁국민정당 국회의원으로 당선한 것을 시작으로 정치인의 삶을 살았으니, 그가 정치인의 옷을 입고 보낸 기간은 6년이다. 그는 “열심히 일했지만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살아가는 것이 몹시 괴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장관을 하면서 6년을 보내는 동안 국민이 주신 봉급 받아서 생활한 거잖아요. 아주 괴롭죠. 자기가 시장에서 뭐든 해서 먹고살면 마음이 편하지만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국민에게 만족감을 드리지 못했나 봐요. 그러니까 정권도 잃고 국회의원도 떨어졌겠죠. 결국 국민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러면 국민의 기대라는 게 과연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었냐 물으면, 누구도 충족시킬 수 없는 기대와 요구도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도 대통령만 바꾸면 금방 그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처럼 보수언론에서 지속적으로 선동했잖아요. 정권 교체가 된 지금을 보세요.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된 건 일자리 문제를 해결한다는 게 핵심 아니에요? 그런데 이명박씨가 어떻게 일자리를 창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그저 감세나 작은 정부, 경제성장률 제고를 말하는데, 이런 것은 방법론이 아니에요. 참여정부가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만든 정책도 다 파기하고 있으면서 이명박씨가 어떻게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대선 당시 이명박씨가 공약으로 내건 경제성장률 7% 달성과 연간 60만 개 일자리 창출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게 차라리 홀가분하다”고 표현했다. 정부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설명하려고 하면 무능, 책임 회피, 변명으로 몰아붙이며 들어주지 않아 논의 자체가 불가능한 폭력적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담론이 폭력적으로 가면 소통이 안 되고 소통이 안 되면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면서 “푸념을 하자면, 정말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다”고 토로했다.

그는 18대 총선에 대구 수성 을에 출마해 낙선했다. 진보 정치인인 그가 한나라당 텃밭인 대구 지역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수성 을에 도전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눈길을 끄는 일이었다. 또 비록 낙선했지만 득표율 32.6%를 기록한 것은 분명 하나의 사건이었다. 요지부동하게만 비춰지던 대구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징후기 때문이다.

그가 대구 출마를 결심한 데는 연고지라는 점도 작용했다. 1959년 여름 경북 경주에서 2남 4녀 중 차남이자 다섯째로 태어났지만 역사 교사였던 아버지가 경주여고에서 대구중학교로 전근한 1966년에 대구로 이사했기 때문이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유 의원은 이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어린 시절 그의 집은 가난했다. 가난은 자존심 강한 우등생이던 소년 유시민을 괴롭혔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길 건너편에 짐을 이고 가는 어머니가 부끄러워 모른 척 지나간 일로 며칠간 번민하고 자학한 일도 있었다. 소년은 빨리 출세해 가족을 가난에서 해방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장래 법관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우리 사회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해방 직후부터 교직에 몸담았던 아버지의 봉급이 대학을 갓 졸업한 교사의 초임과 같았기 때문이다. 유 의원은 자전적 글에서 “누구보다 훌륭한 교사이자 자상한 아버지가 좀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고 권모술수를 모른다는 이유로 냉대받고 소외당하는 현실에 가슴 속에서 분노가 일었다”고 회고했다. 이때부터 그는 가난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게 됐다고 한다. 성실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게 힘껏 일했는데도 가난하다면 그 가난이 경멸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그는 학교와 교과서에 대해 그리고 부조리한 세상에 대해 냉소적으로 변했다.



1978년 서울대 사회계열(법대와 경영대, 사회과학대학의 신입생을 한꺼번에 뽑는 계열별 모집이었다)에 입학한 그는 자연스럽게 운동권이 됐다. 지하서클에 가입해 독서와 토론을 하고, 농촌활동을 했으며 구로공단에서 야학 교사를 했다. 그는 “저임금의 열악한 근무 조건에서 혹사당하면서도 열심히 살아가는 공장의 어린 소녀들을 보며 가난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고 말했다. 그는 법대를 포기하고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사법부에 좌절한 탓이다.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으로 늘 시위대의 선봉에 섰던 그는 5·18 전날인 1980년 5월 17일 학교에서 체포돼 계엄사 예하 수사대로 끌려갔다가 석 달 만에 석방된 후 군대에 끌려갔다. 그리고 32개월을 꽉 채우고 1984년 제대했다. 일명 서울대 ‘프락치 사건’은 그가 제대 후인 1984년 복학생협의회장을 맡은 지 얼마 안 돼 터졌다. 이 사건으로 그는 유죄 선고를 받아 1년 남짓 징역을 살고 특별복권됐다. 그는 제적과 복학을 거듭한 끝에 대학 입학 후 13년 6개월 만인 1991년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당시 평민당 국회의원이던 이해찬 전 총리의 보좌관으로 들어간 해인 1988년은 그가 작가로 데뷔한 해기도 하다. 소설 ‘달’로 문단에 데뷔한 동시에 베스트셀러 ‘거꾸로 읽는 세계사’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두 편 모두 1987년 수배 중 쓴 것이다.

“6·29 선언이 나온 직후 ‘6·29는 속이구다’라는 유인물을 만들어 나오다가 걸려서 도망쳤고 곧 수배령이 떨어졌어요. 전 서울 은평구의 반지하 주택에 숨어 있었죠. 가끔 사람을 접선하는 일 외엔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책을 썼고, 그게 이듬해 봄에 탈고돼 여름에 나온 거예요.”

유 의원이 누구보다 말을 논리적으로 잘 한다는 사실은 TV 진행자(MBC ‘100분토론’ 진행자로 1년 7개월간 활약했다) 또는 토론자로 참여한 모습을 보면서 일반인들도 익히 알고 있다. 실제로 녹음한 그의 말을 재생해 들으면 단어 선택을 포함해 문장 하나하나가 완벽에 가깝다(인터뷰를 하다 보면 상대방이 말을 잘 하는 것 같은데도 막상 녹음한 것을 다시 들으면 앞뒤 말이 연결되지 않는 이들이 상당수다). 당연히 글도 논리적인데 여기에 문학적 감수성까지 더해졌으니, 그 수려함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됐을 때 쓴 명문(名文)의 ‘항소 이유서’가 19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처럼 읽혔을 정도다. 그에게 남다른 글재주가 있음을 처음 깨닫게 해준 이는 합수부 수사관이었다고 한다.



“5·18때 합수부에 끌려갔는데 이틀간 마구 때린 후 진술서를 쓰라고 했어요. 쓰는 동안은 맞지 않으니까 계속 써댔죠. 하루에 편지지 100장을 쓴 일도 있어요. 그때 수사관이 제 글을 사람들에게 읽어주며 생생하게 잘 썼다고 칭찬하더라고요. 지하 조직에 대한 이야기는 빼고 학생회 이야기만 잔뜩 썼는데 우리가 시위할 때 플래카드엔 뭐가 써 있고 주변 풍경은 어땠는지 등의 각종 묘사를 곁들었거든요.”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순)심인고 2학년 가을 소풍 때 모습. 1983년 육군 병장 시절 강원 화천 백암산에서. 1989년 11월 이해찬 의원 보좌관 시절, 당시 노무현 의원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은 그가 13대 국회 때 이해찬 의원실에서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노무현 통일민주당 의원과 이해찬 평민당 의원이 모두 국회 노동위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눈에 노무현 의원이 대통령감임을 알아봤다고 한다. 그는 “당시는 내가 일방적으로 노 의원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관계였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좀더 가까워진 것은 유 의원이 독일 유학 중일 때다. 유 의원은 아내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1993년 독일 마인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대학교 대학원으로 떠났다. 5년의 유학 기간 중 잠시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노 의원을 만났고 주로 경제와 관련한 지식을 공유했다. 그리고 2002년 대통령 후보 경선 때 노무현 후보의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서로 신뢰가 두터워졌다. 민주당 후보로 노 후보가 당선한 후 집필에 몰두하려던 그는 후단협의 노 후보 낙마 움직임에 분노해 “다시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트 앞에 서는 심정”이라며 절필을 선언하고, 개혁정부 수립과 노 후보 당선을 위한 창당작업을 시작했다. 개혁국민정당은 2002년 11월 그렇게 해서 창당된 것이다.



정치를 시작하면서 그는 ‘정당혁명’을 부르짖었다. 즉 유착의 대가로 받은 검은 돈이 아니라 당원들이 내는 깨끗한 돈으로 운영하는 정당, 지역감정을 선동해 특정 지역의 몰표를 받기를 거부하고 개혁적 정책과 노선으로 전국적 지지를 모으는 정당, 당원과 국민이 주요한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다. 개혁적 국민정당을 해산한 직후인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그는 “정당혁명을 열린우리당을 통해 이루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런 간절한 열망은 결과적으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그는 “역량 부족으로 완전히 좌초했다”고 평가했다.

“정당을 하고 있는 사람 중에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주 적거나, 실제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안 하려고 하면 힘으로 제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설득도 안 되고 힘도 없으니까 안 된 거예요. 과반수 받아서 정권 잡았다가 인기 없어졌다고 당을 없애버리고, 국민이 외면하면 야당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데, 야당 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독선에 빠져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긁어모아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들었잖아요. 게다가 불합리한 방식의 경선으로 후보를 뽑고, 후보를 선출하고 나서는 정책은 제쳐놓고 네거티브 인신 공격에 빠지고,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책임정치의 원리를 완전히 일탈한 것이고 자기정체성을 부정하는 행태잖아요.”

그는 “열린우리당의 소멸을 묵과 내지 협력했던 일이 정치생활 중 가장 후회된다”고 말했다. 고립에 대한 두려움, 또 소수가 남아 당을 지킬 때 분열주의자로 낙인 찍히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대통합민주신당 예비 경선에 참가한 것이 부끄럽다는 것이다(그는 본경선 일주일 만에 사퇴했다).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다. 참여정부의 핵심 멤버인 그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그는 “종부세, 국가균형발전 정책 등 참여정부의 개별정책에 대한 지지도는 찬성 쪽이 훨씬 높은 게 대부분임에도 대통령의 말이나 성품과 관련해 일부 보수언론이 집중적으로 국민과 거리감을 조성하는 전략을 썼고, 우리가 그에 대해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부나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포괄적으로 낮았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 “지지율이 높은 개별정책들이 총체적인 국정수행 지지율로 연결되지 못한 아픔을 가지고 5년을 보냈다”면서 “보수언론과 싸움에서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완패했다”고 말했다.

“전 소시민 입장에서 국정원, 검찰, 경찰, 청와대 어느 곳도 두렵지 않지만 조·중·동과 같은 보수신문은 무서워요(웃음). 그 분들은 개인적인 감정을 지면을 통해 풀거든요. 과거 노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모든 것을 동원했고, 참여정부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은 것 아니에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똑같은 사안에 대해 입장을 바꾸면서 국민을 욕하고 있잖아요. 광우병 문제만 해도 그래요. 참여정부는 한미FTA와 쇠고기 수입을 분리해 협상하려고 상당히 공을 들였어요. 그 결과 30개월 미만의 살코기만 수입한다 등의 결과를 도출한 거예요. 그럼에도 조·중·동은 광우병 때문에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죠. 그랬던 그분들이 지금은 30개월 이상 미국산 소가 위험하다고 하는 국민의 불안감을 괴담이라고 몰아붙이잖아요. 이런 태도는 국민에 대한 모욕이에요.”

그는 “순전히 보수신문 때문에 참여정부가 불신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주효한 원인이었고, 이것이 국민의 심성과 국가를 해치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노 대통령 때 모든 문제를 대통령 탓으로 몰았기 때문에, 그게 부메랑이 돼 이명박 대통령이 맞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문제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분석하고 해결점을 고민하기보다 모든 이슈를 대통령 책임으로 몰아가는 풍토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못박았다.

그렇다면 그가 꿈꾸는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자유와 다양성이 키워드”라며 “기회가 많은 사람에게 골고루 주어지고, 정치적 자유뿐 아니라 여러 관습과 문화 그리고 괴짜들의 끼 발산을 너그럽게 받아들여주며, 덜 공격적인 동시에 타인에 대해 좀 더 배려하는 평화로운 나라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권 야망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서는 한 자연인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가장 큰 문제”라며 즉답을 피했다.

●약력
1959 경북 경주 출생
1978 대구 심인고등학교 졸업
1991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취득
1997 독일 마인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취득
1980 서울대 총학생회대의원회 의장
1984~1985.10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
1988 창작과비평에서 소설 ‘달’로 등단, 교양서‘거꾸로 읽는 세계사’ 출간
1988. 9~1991. 2 이해찬 의원 보좌관
1994. 3~1996. 2 한겨레신문 독일 통신원
1999. 1~1999. 6 한국학술진흥재단 기획실장 겸 전문위원
1999. 3 성공회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2000. 6~2002. 1 MBC ‘100분 토론’ 진행
2002. 11 개혁국민정당 창당
2003. 4~2003. 10 제16대 개혁국민정당 국회의원
2003. 11 개혁국민정당 해산, 열린우리당 입당
2003. 11~2004. 5 제16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2004. 5~2007. 8 제17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2006. 2~2007. 5 제44대 보건복지부 장관
2007. 8~2008. 1 제17대 대통합민주신당 국회의원
2008. 1 대통합민주신당 탈당
2008. 1~2008. 5 제17대 무소속 국회의원

“참 닮고 싶은 분은 리영희 선생”

인생 좌우명 남에게 폐 끼치면서 살지 말자.
인생에 가장 영향을 끼친 책 성장 과정에서 제일 충격을 준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3학년, 대입 예비고사 한 달 전에 우연히 책을 잡았다가 밤을 꼬박 새우며 읽었다.
가장 영향을 끼친 인물 나의 지적인 성장 과정에서 가장 영향을 끼친 사상적 은사를 딱 한 분만 꼽으라면 리영희 선생이다. 한 번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참 닮고 싶은 분이다. 지적인 통찰력과 연구하는 자세, 사회적인 삶, 그리고 사회적인 삶을 마감하는 형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존경스럽다.
노래방 18번 박상철의 ‘무조건’.
주량 약하다. 가장 많이 마신 것은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제주도에서 국민연금법 때문에 기자들과 만났을 때 마신 폭탄주 7잔. 마시고 이내 곯아떨어졌다.
콤플렉스 술 잘 못 마시는 것.
스트레스 해소법 낚시와 축구.
흡연 사흘에 두 갑 정도. 특히 술 마실 때와 집필할 때, 그리고 인터뷰할 때 피운다.
잘하는 요리 해물스파게티와 냉면. 유학시절엔 저녁식사 준비는 거의 내 담당이었다.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집사람과 결혼한 것. 아내가 없다고 상상하면 못 견디겠다(그는 역시 서울대 운동권인 여동생의 소개로 서울대 후배이자 공장에 위장취업해 있던 한경혜씨와 1988년 11월 결혼했다).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hyang.com>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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