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꼼수 봉주 8회가 올려오려나...

주말이면 집에서 일을 하든, 아니면 밖으로 산행을 하든 이제는 습관적으로 드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꼼수를 듣노라면 늘 딴지총수의 "투표근이 근질거린다"는 말이 떠오른다.

 

어제 KBS에서 특집으로 하는 정치 관련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보았다.

내용인 즉, 이제 사람들이 정치와 생활이 밀접함을 느끼기 시작했고ㅡ

그래서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정당 정치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취지였다.

 

맞는 말이다.

얼마 전, 한명숙 대표가 민주통합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는데는 새로 도입한 모바일 투표방식과

개방된 국민경선단 제도가 밑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대표로 당선된 한대표 체제는 형식만 새로와졌을 뿐,

본질적으로 구세대적 사고와 정치틀을 깨기 힘들다는 점을 시작부터 드러내기 시작했다.

 

FTA에 대한 애매한 입장도 그렇고, 석패자 부활제 도입을 둘러싼 여야간 흥정도 그랬다.

공천심사가 다가올수록 민주당 앞에 줄을 서서 밀려드는 후보들의 무리 앞에

민주당은 마치 정권을 먹기라도 한 것처럼 기고만장하는 모습이었고, 국민들이 보기에는 

거들먹거리는 수준에 가까와 보였다.

 

결국 여론은 순식간에 민주당을 민통당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통합의 의미를 져버리려는 민주당에 대해 싸늘하게 반응을 표시했다.

즉각적인 한명숙 대표의 트위터 계정에 대한 언팔 운동이 제안되었고, 

19만명에 달하던 팔로워 수는 불과 이틀만에 16만명으로 3만명이 줄었다.

 

자고로 정치에서 오만은 모든 실패의 근간이다.

자력에 의해 확보하지 못한 교두보를 마치 자신들이 싸워서 얻은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스스로 그만큼 허망하게 망하는 지름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론은 차가왔고, 수도권 압승을 장담하던 웃음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급기야, 어제는 새벽을 넘겨 담판을 했던지 민통당과 통합진보당의 야권 선거연대에 대한

합의가 힘겹게 발표되었다.

물론 안된 것보다는 다행이지만, 

분위기 다 흐린 뒤에 마지 못해 하는 듯한 모습이라, 영 기분이 흔쾌하지가 않다.

 

제주 강정 마을의 구럼비 바위를 폭파하는 데 43톤의 화약이 쓰일 거라고 한다.

아... 4 3... 그 악몽과도 같은 숫자가 왜 하필 지금 다시 떠오른단 말인가...

 

‎1948년, 이승만 세력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자 민족 분단을 막고자 일어났던

제주도민의 항거를 "빨갱이들이 선동한 폭동"으로 몰아서 무려 3만명 이상의 제주도민을

무차별로 살해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았고,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것은 학살 그냥 학살이었다.

 

같은 동족이 이념을 무기로 삼아 동족을 살해한 현대사 최대의 유혈참극을 일으킨 친일파의

잔재들이 지금도 여전히 이승만의 동상을 세우고, 박정희의 기념도서관을 지으며 웃음짓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가문의 후예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입술을 앙다물고 나섰다.

 

아, 역사는 이리도 비겁하게 되풀이된단 말인가...

 

페이스북에 요 며칠 강정마을 건과 더불어, 야권연대에 대한 기사를 퍼나르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보이지 않게 친구들의 숫자가 줄어든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글을 올리면 평소와 달리 눈에 뜨일 만큼 미묘하게 친구 숫자가 준다.

 

그 때마다 속으로 생각한다.

아, 친구가 아닌 사람들이 또 이만큼 스스로 정리되었구나...

진짜 친구를 맞아 들일 수 있는 자리가 이 만큼 또 새로 생겨났구나... 잘 되었다.

 

그렇다, 소셜은 철저하게 현실의 연장이고 확장이다.

실상은 친구가 아닌 사람들이 온라인을 매개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서 친구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자가당착일 뿐이다.

그런 소셜 네트워크는 하등 의미도 없고, 유지해봐야 실효도 없다.

 

미안하지만 친구인지 아닌지는 정치적 사안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물론 나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 하더라도 얼마든지 친구일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서로가 상대방의 입장과 태도를 존중해주고 이해해 줄 때라야 가능하다.

 

누군가 자신의 정치적 의사 표현을 내비칠 때,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자체가 부담스럽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친구 관계라 부르기 힘들다.

그런 부분에서 도를 넘는 사람이 눈에 뜨일 때는 나 또한 망설이지 않고 친구관계를 끊는다,

그런 친구를 계속 두고 바라보는 것은 스트레스의 근원을 키우는 일일 뿐이니까.

 

무릇 정치는 본질적으로 이해집단 간의 다툼과 힘의 조정을 놓고 권력을 다투는 행위이고,

그만큼 치열한 싸움의 공간이다.

소셜 또한 현실 사회 관계의 연장이고 반영인 이상 정치적 투쟁의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공간이다.

 

치열하게 싸우되, 그 싸움을 즐기는 것도 정치를 재미나게 하는 아주 지혜로운 방법이다.

해학의 전투, 이제는 그런 싸움이 필요한 시대이다.

강정 마을의 구럼비 바위, 43톤의 폭약 앞에 흔적 없이 사라진들 그게 무슨 대수이겠는가.

 

역사는 삽질 정권의 만행과 발파 정권의 행패를 기억할 것이다.

우리가 43을 잊지 않는 것처럼.

아니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오늘도 정치를 말한다.

그게 바로 내 생활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지름길이니까.

 

졸라 땡큐, 김어준이다!!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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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여기저기 송년 모임이 잦다. 작년 10월 중순에 처음 페이스북에 둥지를 마련한 이래 1년 가까이 페이스북을 이용하면서 요즘 들어 새삼스레 느끼는 것이 에티켓의 중요성이다. 소셜네트워크 자체가 친구나 지인들간의 교류와 커뮤니케이션의 통로이자 사회에서의 관계가 실명으로 온라인으로 이어지는 매개체다. 때문에 이러한 인간 관계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 이른바 '매너'는 더욱 중요하다.

기존에 서로 잘 알던 관계여서 무슨 말을 해도 충분히 서로를 이해하고 깊은 속마음까지 헤아려 줄 수 있다면야 막말이나 진한 농담도 얼마든지 용인이 될 수 있을 터이다. 문제는 새로 사귀는 사람과의 관계다.

트위터와 같이 ‘요청과 수락’이라는 동의 절차가 없이 일방적으로 팔로우와 언팔로우가 가능한 매체에서는 상대적으로 덜할 수 있지만, 친구 ‘요청과 수락’이라는 쌍방의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페이스북의 ‘친구’ 관계에서는 에티켓의 중요성이 훨씬 커진다.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면 말뿐 아니라 표정과 몸동작, 어조나 상대에 대한 배려심 등이 곧바로 행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믿음을 형성하는 것이 훨씬 쉽다. 실제로 행동 심리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이 타인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에서 랭귀지(언어) 요소가 작용하는 정도는 7%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표정이나 행동 등 비언어적 요소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것이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의 위험성을 이루는 핵심이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는 일차적으로 글(언어)만으로 소통을 시도하기 때문에 비언어적 요소로 전달하지 못하는 부분을 더 신중한 ‘말(글)’과 표현으로 보상하지 않으면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십상이다. 실제로 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전혀 의도치 않은 뜻으로 상대방에게 해석되기도 한다.

특히 페이스북과 같이 자신의 실명으로 대화가 이루어지면 이러한 오해들이 커져서 인간적인 실망으로 남거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페이스북에서 이러한 오해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다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에티켓을 지킬 것을 권한다.

 

1. 프로필 사진을 ‘유령’으로 비워두거나, 사물이나 동물로 대신하지 마라.

2. 친구 맺기를 요청할 때는 왜 친구를 맺으려 하는지 ‘메시지’를 꼭 추가하라.

3. ‘좋아요’ 버튼을 밥 먹듯이 클릭하라. 마음의 정성이 클릭 한 번에 담긴다.

4. 쪽지는 뭉개지 말고 신속히 답글하라. 하루를 넘기면 친구의 기대에 대한 배신이 될 수 있다.

5. 사진/동영상 태깅 기능은 적절히 활용하되 남용하지 마라. 잘못 쓰면 절교의 지름길이다.

6. 친구의 글을 [공유하기] 할 때는 간단한 소개 코멘트를 추가하라. RT에 덧붙이는 말처럼.

7. 개인 프로필 계정을 [회사소개 페이지]로 사용하지 마라. 사람은 사람일 뿐 회사가 아니다.

8. 뉴스피드 글을 인용할 때는 꼭 원작자와 출처를 첨부하라. 작자가 혼동되면 오해가 생긴다.

9. 온라인이 능사가 아니다. 때에 따라 필요하면 직접 만나서 소통하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10. 상대방의 본심을 헤아려라. 말이 아무리 험악해도 속뜻은 깊은 애정의 표시일 수 있다.


>> 칼럼 전문 보기 :  
http://www.betanews.net/bbs/read.html?&mkind=399&page=1&num=523245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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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소셜미디어 진화의 배경과 기술적 의미



웹을 통해 이런 저런 지식을 접하면서, 제일 감탄스러운 점은 내가 고민하는 문제는 넓은 세상 속에 다른 그 누군가도 함께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의 99% 이상은 이미 그 누군가에 의해 해결 방안이 나와 있다" 점입니다...

어쩌면 네이버가 [지식인]이라는 검색 무기 하나로 사실상 상업용 광고판으로 전락해버린 자신들의 검색 서비스를 유지 하고 있는 것이나, [구글]이 애드센스 같은 광고용 툴을 붙임에도 불구하고 그 검색결과를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은, 바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고민점에 대해 다른 누군가가 답을 제공하고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지요...

이 얘기는 거꾸로 보면, 매우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그 누구도 새로운 글이나 포스트를 올려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내가 아무리 새로운 이슈나 화제에 대해, 제 아무리 빨리 글을 올리거나 해답을 제시한다고 해도 인터넷을 이용하는 수억 명의 지구촌 인구 중 누군가는 그 해답을 웹의 어딘가에 이미 올려두었을 가능성이 99% 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찾고자 하는 해답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수 있다면 굳이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굳이 나의 포스트로 만들거나 재가공해서 올리는 행위 자체가 무척 "비경제적인" 짓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인터넷이라는 도구가 우리의 생활 속으로 침투하고, 검색 서비스가 진화해온 트렌드를 가만히 살펴 보면 아주 재미있는 현상을 알 수 있습니다.

뭐냐면, 일정한 시점까지는 검색 포털이 유용성을 인정 받아 포털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서비스를 주도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정확히 말하자면 검색의 결과(리스트)가 너무 많이 나와서 어느 것이 내가 찾는 정보인지를 바로 알 수 없어 "검색 결과 내에서 다시 추가 검색"을 위해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순간부터 새로운 니즈가 발생합니다.

요컨대, 좀 더 정확하게 잘 찾아주는 검색 조건식을 주거나 자연어 질문을 해석할 줄 아는 "똑똑한" 지능형(시멘틱) 검색이나, 아예 질의응답 방식으로 구성된 "문답식" 지식인 검색에 의존하는 비율이 점차로 증가된다는 것입니다.
(국내 검색 포털들의 검색 서비스 방식의 변천을 보아도 유사한 흐름이 보여집니다...  엠파스 ->네이버 지식인->구글 조건검색 -> 네이트/빙 시만텍 검색 등등)

그런데, 이들 서비스마저도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한 상업 광고나 스팸성 쓰레기(가비지) 정보들이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정작 내가 찾는 정보보다 엉뚱한 정보를 클릭하면서 내게 맞는 정보인지 아닌지를 찾고 걸러내는 시간이 많아지는 순간부터 이와 같은 지식인형 검색 서비스조차도 이제는 사용자들로부터 외면받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저는 네이버의 미래가 걱정됩니다..)

작금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가 새로이 부상하고 각광받는 이유는 단지 스마트폰과 같은 모바일 기기나 장치들이 발전한 때문만은 아닙니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내가 찾고자 하는 정보를 "검색 로봇"이나 "검색 포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해 가장 정확한 답을 실시간으로 해줄 수 있는 누군가, 전문가를 찾아서 직접 물어보는 것이 문제 해결의 지름길임을 간파한 인간들의 경제적인 요구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홍수처럼 쏟아지는 검색 결과 중에서 또다시 정답을 찾는 수고와 시간 낭비를 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져 놓으면 실시간으로 그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집단지성망' 혹은 '해답을 알려줄 수 있는 휴먼 네트워크'를 갖추는 것이야말로, 수고스러운 셀프 검색을 대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현명한 수단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은 결과인 것입지요...

마치 우리의 조상들이나 인디언들이 삶의 지혜를 얻고자 할 경우 책이나 시행착오적 체험에서 얻기보다는 일차적으로 할아버지나 할머니, 혹은 족장이나 제사장과 같이 삶의 오랜 경험 속에서 우러난 이야기(Story)와 지혜를 통해 깨달음(해답)을 얻었듯이 "사람들"에게 묻는 형태로 되돌아간 셈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SNS로 전면화되고 있는 "소셜 미디어"라는 것은 "모바일 웹브라우징" 또는 "모바일 컴퓨팅"이 가능해지는 통신 환경의 "기술"적 진화가 문제의 해답과 지혜--컨텐츠(스토리)--의 원천 소스인 "사람"과 연결되면서 탄생한 매체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요컨대, 소셜미디어는 기술과 인간이 만나는 역사의 진화 과정에서 출현한 하나의 필연적 산물이라는 생각입니다.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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