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06.06 18:27 http://cafe.daum.net/mindong1990/MnGi/35

    공화국의 죽음과 새로운 시민의 탄생

     

    [노무현을 기억하며] 노무현을 넘어 '우리'를 보자

     

    [프레시안] 기사입력 2009-06-05 오후 5:12:31

     

    애도는 특히 그 죽음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을 때, 죽음에 대한 슬픔을 공유하며 사람들은 누가 이 사람을 죽였는지, 죽은 이 사람은 누구인지를 다시 물으면서 죽인 사람에 대한 강력한 적대를 형성하게 된다. 누가 죽였는가? 이명박 정부와 검찰, 그리고 하이에나 언론이다. 스스로를 일관되게 인간적으로도 노무현을 싫어했다고 말한 보수주의자부터 노무현의 정책에 거의 대부분 동의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진보주의자에 이르기까지, '검-권-언'이라는 거대한 권력'동일체'를 해체해야한다는 것을 절감하는 '우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애도는 이처럼 강력한 정치적 힘이 있다.

    작년 촛불을 통하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고 외쳤던 이들이 노무현의 죽음과 함께 '민주공화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의 삶의 강퍅함에 대한 슬픔을 공유하며, 노무현의 죽음과 함께 우리들의 삶을 애도하고 있다. 자살한 전前 대통령의 주검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수구보수들의 의도대로 정의롭지 못하고 부정부패한 정치인의 주검이 아니라 그 너머에 보이는 공공公共적이고 조화調和로운 삶'이라는 공화국共和國 가치이다.

    보라. 이 나라 어디에 공공적인 것과 조화로운 것이 존재하는가? 법과 감사의 칼바람에 전직 대통령마저 쓰러져버리는 이 사회의 어디에 시민들의 침해될 수 없는 존엄한 권리가 존재하는가? 사람들의 삶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 나라는 더 이상 공화국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애도하고 있는 것은 이 나라 자체, 즉 '공화국'이다. 그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집권기간 내내 '대결과 불화'의 정치인으로 비하되었던 노무현을 '소통과 화합'의 정치인으로 재생하고 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노무현은 역설적으로 공화국의 가치를 지킨 '마지막 대통령'으로 복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슬퍼하고 있는 죽음은 노무현이라는 개인의 죽임이 아니라 공화국의 죽음 그 자체인 것은 아닌가?

    노무현,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장면. ⓒ프레시안

    공화국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운용, 유지되는가? 간단하게 말해 공화국이란 사회적 갈등이 제도 정치의 영역에서 말과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체제가 아닌가? 말로 하자는 것, 제도권의 영역에서 말로 타협하여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체제, 그것이 바로 공화국이다. 그래서 공화주의자 안에는 사회주의자도 있고, 자유주의자도 있고, 보수주의자들도 있을 수 있다. 공화주의는 철저하게 제도의 운용에 대한 형식적 문제이지 정책 내용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노무현은 말의 가치를 인정하고 타협의 과정을 존중한 근세사에 보기드문 대통령이었다. 그가 권력 기관에 의한 강권과 공작이 아니라 말의 가치를 인정하고 믿었다는 점에서 그는 '말과 토론'이라는 공화국의 가치에 기반을 두어 통치를 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애도의 과정에서 복기되고 있다.(물론 그의 말과 토론은 철저하게 제도권 내에서의 문제이다. 거리의 정치에 대해서 그가 취한 입장은 더 복잡하다. 아래에서 이야기하는 공화국은 철저하게 제도 정치 내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이다. 사실 노무현은 집권 기간 내내 수구보수들은 그의 집권 기간 내내 그를 대결과 불화의 상징으로 몰아갔다. 그가 자신의 파당을 떠나서 공공의 조화를 추구해야하는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를 망각하고 '회전문 인사'와 '코드 인사'를 통하여 대화와 타협 없이 자신의 주장대로 밀어붙였다는 것이 주된 비판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꼼꼼히 살펴보면 우리는 놀랍게도 노무현이 제도 정치 안에서 한편에서는 대통령 개인으로서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 권력을 가진 통치인으로서는 법과 제도의 문제(즉 제도권의 영역)에서 수구보수와 끝까지 말로 해결하려고 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대연정의 제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말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공화국-共과 和의 나라 -대통령이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소원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한국의 수구보수는 말과 타협의 가치를 믿지 않고 그 가치를 존중해주는, 그런 공화주의적 가치가 마음에서 완전히 결여된 존재들이다.(아이러니하게도, 미디어법이나 다른 법과 제도의 정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불화를 실체화하고 있는 것은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는 애초부터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기득권자의 이해 수호자로 나섰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무현의 딜레마가 있었다. 그는 수구보수를 공화국의 파트너로 인정을 하던지(이럴 경우에 그가 취할 수 있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정책은 거의 없다), 아니면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를 밀어붙이던지(이럴 경우 그는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기를 포기하고 우리 사회가 근본적 불화상태에 빠지는 것을 감당해야한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야 했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공화국이라는 틀을 지키는 것을 택하였다. 그 결과 그는 대통령 개인으로서는 수구보수 기득권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지만, 통치의 영역인 법과 제도에서는 그 어떤 불화와 적대도 실체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그 분열은 곧 대화와 통합의 정치의 종식, 즉 형식 민주주의 안에서의 공화국의 포기를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혼란은 노무현 아니라 노무현 할아버지라고 하더라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사회의 분열'이 아니라 '자신의 분열'을 택한 비극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다. 플라톤의 '하나가 되기 위해 나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전세계와 불일치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격언의 정확하게 거꾸로 간 비극적인 인물인 것이다.

    법과 제도 개혁 앞에서 무릎 꿇은 공화국의 가치

    대표적인 것으로 대체복무제가 있다. 노무현의 서거 이후에 만난 병역거부운동을 하는 후배가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들 '이렇게 갈 것 같으면 병역거부라도 해결해 놓고 가시지....'라고 한탄하고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사실 노무현은 소위 개혁이고 진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거부감을 가졌던 병역거부의 권리를 인정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이것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을 하는 임재성씨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 그가 쓴 글의 제목이 '총 들지 않을 자유, 그는 알아줬다'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바로 이명박과 노무현을 가르는 기준점이라고 말을 한다. 맞다. 그래서 나도 노무현이 이명박과 같은 신자유주의자들과는 민주주의와 인권, 즉 인간에 대한 관점은 달랐다고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노무현이 빠진 근본적인 딜레마 때문에 그가 대체복무제를 제도화할 수 없었다. 그는 대체복무제를 '알아주는'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영혼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래서 그의 영혼'만'이 우리와 함께 있었던 집권기간에 당연히 그의 지지도는 곤두박질을 치지 않을 수 없었고, 영혼만 보게 되는(봐도 되는) 그의 죽음 이후에는 우리가 그토록 그의 가치를 존중하고 복기하며 슬퍼할 수 있는 것이다.

    사형제 폐지도 마찬가지였고, 국가보안법도 그렇고 언론 개혁이나 검찰 개혁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우리 사회가 근본적인 불화 상태에 빠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가 취할 수 있었던 것은 법과 제도가 아니라 관행이었다. 사형제는 집행되지 않았고 국가보안법은 '사문화'되었다. 그러나 법과 제도를 건드리지 않는 한 모든 적대는 실체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통치는 법과 제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행에 반하는 법과 제도를 남겨둔 채, 그 관행만으로는 처리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그 사문화되었다고 이야기하는 법과 관행들이 다시 무소불위의 칼이 되어 돌아온 것을 보고 있다.

    용산참사 이후 문제가 되어 있는 검찰의 수사기록 공개 거부에 대해서도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검찰이 기소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집권 기간 동안 그는 내내 검찰의 권력과 싸웠지만 검찰기소독점의 폐해를 해소할 수 있는 그 어떤 제도나 법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어디 이것들뿐인가? 돌이켜보면 수많은 일들이 그러했다. 그는 관행적으로 막을 수만 있었을 뿐 그것을 제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장치는 거의 아무것도 만들지 못했다. 노무현 역시 그 칼에 의해 희생되었다.

    대통령을 갈아치우는 것보다 법 하나 바꾸는 것이 더 어렵다

    노무현의 죽음에서 우리가 배워야하는 것은 권력의 하부 구조의 민주화 없는 권력 교체는 허깨비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을 갈아치우는 것보다 더 끔찍하게 어려운 것이 국가보안법이건, 대체복무제이건, 사형제 폐지이건, 이런 제도 하나를 고치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것보다 법과 제도를 뜯어 고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이것은 우리가 숱한 정치/사회 투쟁에서 범한 오류이다. 속된 말로 우리는 많은 투쟁에서 '현금주고 어음 받는' 어리석은 짓을 참으로 많이 해 왔다.(심상정 진보신당 전 대표의 '아름다운 도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내가 상대해야 할 경제 관료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에 차 있는 사람들이었다. 2002년 대선 전야, 이회창의 낙승을 예상하고 있던 관료사회는 노무현의 당선가능성이 높아지자 충격에 휩싸였다. 그 때 재경부의 한 고위관료가 내뱉은 말이 여러 사람에게 회자되었다. "노무현 아니라 권영길이 돼도 상관없다!")

    지난 촛불 때만 하더라도 사람이 많이 모인 것에 고무되어 무조건 청와대로만 외치다가 결국은 어청수 하나 제때 쫓아내지 못했으며, 집시법이든 무엇이든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그 어떤 법도 제대로 민주화해내지 못하였다. 오히려 우리는 투쟁을 통하여 국정쇄신과 인적 청산을 요구할 때마다 권력의 시스템을 민주화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물갈이만 도와주는, 그것도 늑대 쫓아내고 호랑이 불러들이는 식의 악순환에 빠지기도 하였다. 지금 노무현의 서거 이후에 한나라당에서 제기되고 있는 인적쇄신과 국정기조 전환이 민주주의나 인권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오히려 친이계 파벌간의 파벌다툼의 명분만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봐야하는 것은 바로 악의 평범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노무현이 희생되게 된 것에는 검찰과 경찰, 그리고 국세청의 '충성경쟁'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권력 앞에서 알아서 슬슬 기고 과잉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용산참사도 그런 과잉충성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맞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만약 노무현을 조사한 검사나, 용산을 침탈한 특공대가 악마가 아니라 그들은 아주 평범하게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그리 과잉하지 않고 그저 수행한 것이라면? 이것이 악의 평범함이다. 관료제사회에서 악이 이토록 평범한 것이라면, 우리는 악을 악마화, 그들을 악마화 하는 방식으로는 거의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악마를 솎아 내봤자 악의 평범함은 평범한 사람을 통해서 언제나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오히려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하는 것은 악의 악마화를 용인하는 현재의 권력 구조이며 그 권력 구조가 작동할 수 있는 법과 제도의 문제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마르크스를 빌려 고병권이 비꼬는 것처럼 교회는 그냥 두고 교황만 없애려는 시도이고, 당나귀는 그냥 둔 채 자루만 두들겨 패는 격이 된다.

    그래서 책임자 처벌이 못지않게 법과 제도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 예를 국가인권위에서 볼 수 있다. 일단 한번 만든 제도이다 보니 이 정권이 없애기 위해서 그토록 노력하였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엄청난 저항에 부딪쳤다. 결국 인원을 감소하는 것으로 귀결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제도가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버틸 수 있었을까? 제도가 아닌 관행이자 '별정직'이나 '임시직' 형식의 다른 모든 제도들에서 이명박 정권이 사람을 내쫓고 기구를 축소한 것과 비교해보면 이 차이는 더욱 크게 드러난다.

    법과 제도, 특히 권력의 졸(卒)들이 부리는 하위 권력의 민주화가 없이는 법은 언제든 강권통치의 수단으로 바뀌고 하부권력을 악마로 만들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독재 권력인가? 맞다. 그러나 이 정권은 박정희와 전두환과 같은 '초법적인 독재권력'이 아니라 '법을 통한 독재권력'이다. 이것이 이명박 정권이 내내 법치를 강조하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바로 이명박이 이야기하는 그 법과 제도, 그것의 민주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공화국을 향하여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에서 루이 16세의 처형을 '국가의 자살'이라고 부른다. 프랑스 국민들은 사실 도망가던 루이16세를 붙잡자마자 바로 죽여 버릴 수도 있었는데(즉 살해할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단두대로 끌고 가서 '처형'을 시켰을까? 이에 대한 칸트의 이야기와 주판치치의 해석을 따라가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살해는 국왕 개인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이지만 처형은 국왕이라는 형식, 혹은 제도의 종식이 되어버린다. 국왕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처형함으로써 프랑스의 국민 모두는 이미 국왕제라고 하는 제도를 유지하면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죄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국왕의 처형과 함께 왕정제를 폐지해야만 했다.

    노무현의 죽음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현재의 형식적인 공화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형식적으로만 죽어야했다. 법의 심판대 앞에 끌려가서 법의 엄정함과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어야 했으며 이를 통해 부정부패로 상처받은 형식적인 공화국은 재생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신체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수구보수들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부정부패라는 '사실(지금은 이것도 어느 정도 사실인지에 대해서 온갖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는 터이지만)'에 맞서 공화국의 진실(이 공화국이 전혀 공화국이 아니라는 것)을 폭로하였다. 형식적으로만 죽어야하는 존재가 진짜로 죽어버린 것이다. 공화국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 했던 공화국의 대통령이 권력에 의해 신체적으로 자살함으로써 공화국은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처럼 노무현의 죽음은 공화국의 죽음이다. 말과 토론, 그리고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면 '절제와 품격'있는 법집행이라는 공화국의 원칙과 가치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 죽은 공화국은 노무현 대통령에게만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애초에 대한민국은 공화국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가 지키기를 원했던 공화국은 허상-유령이었다. 수구보수 기득권들의 공화국에 대한 파괴의 협박위에 세워진 것이 한국의 공화국이다. 노무현의 죽음과 함께 우리는 비로소 우리 모두가 '벌거벗은 임금님'을 향해 소리를 치는 것처럼 우리 사회가 공화국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이제 공화국을 만드는 것이다. 공화국의 죽음을 애도하고 말과 토론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어야한다. 작년 광우병 파동으로 이 공화국 안에서의 삶의 처지를 경험했었고, 올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죽음을 공유하게 된 '우리'가 말이다. 이 우리는 과연 새로운 공화국의 새로운 시민으로 성장할 것인가? 이것은 전적으로 그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적어도 삶과 죽음에 대해 이토록 독특한 경험을 공유하며 공화국과 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의 감각을 가진 새로운 '우리'의 탄생은 적어도 '희망의 사건'인 것임에는 틀림없으니.

    자. 이제 노무현을 넘어 새로운 '우리'를 보자. 노무현을 애도하며 우리가 무엇을 기억했고, 무엇을 보았는지를 이야기하자. 그러면서 우리가 무엇을 만들었는지를 보자.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만들지 않았는가! '우리'가 있다면 여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할 힘은 있는 것이다. 당신을 넘어,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이 '우리'를 보며, 편히 쉬세요. 노무현 대통령.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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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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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06.06 10:07 http://cafe.daum.net/mindong1990/MnGi/34

    빈자의 무기, 그리고 노무현
    한겨레 한승동 기자
    » 빈자의 무기, 그리고 노무현
    디아스포라의 눈 /

    호찌민의 청빈 이미지는 항미 전쟁에서 싸워 이기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청빈과 도덕성은 빈자나 약자가 부자나 강자와 싸울 때 필수불가결한 무기다. 노무현씨와 호찌민을 비교하는 게 적절치 않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굳이 그런 시각을 제시해보고 싶어졌다.

     

    얼마 전 ‘봄에 죽음을 생각하다’라는 글을 썼는데, 공교롭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음을 택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국민장을 치르는 날에 이 글을 쓴다.

    실은 지난주 충북대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 참석차 이틀간 한국을 찾았다. 5월 23일 아침 일찍 일본에 돌아왔는데 하네다 공항 텔레비전 뉴스가 노 전 대통령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아내였다. “잘 다녀오셨어요?”라는 인사도 차리기 전에 그는 “뉴스 봤어요?”라는 말부터 꺼내더니 “이제 한국 사회도 좀 평온해지려나 했는데…. 나 울어버릴 것 같아요”라고 했다. 아내는 노무현씨 팬이었다. 일본인인 그에게도 노무현씨는 진보·민주·평화라는 가치들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가 충격을 받은 사실에 놀라면서 새삼 나 자신이 몹시 냉정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집에 돌아와 한국에 있는 지인 두세 사람에게 감상을 물어봤다. 어떤 이는 울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몹시 분개했다. 대답은 모두 예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그것은 그들이 노 전 대통령과 민주화나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꿈을 공유하고 고락을 함께하며 싸워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못한 내가 그들의 슬픔과 분노를 공유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그러므로 나 같은 국외자가 왈가왈부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생각이 채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라도 한마디 하고자 한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한다면, 처음 내게 떠오른 생각은 “나약하구나”라고 할지 “서투르구나”라고 할지, 그런 것이었다.

    제3세계 정치지도자들은 사후에 권력남용, 부정축재, 친인척 비리, 이성관계 등 생전의 부정이 폭로되기 일쑤다. 예외는 저우언라이, 체 게바라, 그리고 호찌민 정도일까.

     

    호찌민에겐 형과 누나가 있었는데 두 사람 다 프랑스에 대한 저항운동에 가담했다가 투옥당한 적이 있다. 1945년 8월 베트남민주공화국이 독립했을 때 그의 누나는 새 정부의 주석이 오랜 세월 소식도 없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 ‘오리 2마리와 달걀 22개’를 선물로 싸들고 하노이까지 동생을 만나러 갔다. 그 뒤 누나는 고향마을에서 보통의 농촌 아낙네로 살다가 9년 뒤 죽었다. 형도 동생을 만나러 갔으나 호찌민은 형을 관저에 들이지 않고 교외의 친척 집에서 1시간 정도 만났을 뿐, 그 뒤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

     

    이것은 호찌민의 결벽증을 전해주는 삽화들 가운데 하나다. 어쩐지 잘 만들어진 우화 같은 느낌도 들지만, 이야기의 진위야 어떻든, 이런 이미지를 호찌민 자신과 그 동지들이 전략적으로 중시하고 있었던 건 분명하다. 얇은 파자마 같은 농민복을 입고 폐타이어로 만든 샌들을 신은 가난한 사람들이 강대한 미국을 상대로 싸웠다. 이런 청빈 이미지가 남베트남 정권의 부정부패를 증오하는 국내 민중에게만이 아니라 국제사회에 대해서도 항미(抗美)전쟁에서 싸워 이기는 데 사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청빈과 도덕성은 빈자나 약자가 부자나 강자와 싸울 때 필수불가결한 무기다. 노무현씨와 호찌민을 비교하는 게 적절치 않을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굳이 그런 시각을 제시해보고 싶어졌다.

     

    이명박 정권이 검찰을 동원해 정치보복을 했다는 얘기는 사실일 것이다. 거기에 분노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모든 정치권력은 으레 무자비하고 낯 두꺼운 정치보복을 한다. 노씨가 그걸 예상하지 못했을까? 재임중에 그런 걸 예상하고 대비하지 않았다면 가열찬 정치투쟁을 한 지도자로서는 좀 서툴렀던 게 아닐까. 본인은 받은 줄도 몰랐던 것 같고, 문제가 된 돈의 액수도 과거 권력자들이 받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고 누가 변명해줄지 모르지만, 그래도 노씨가 내건 원칙과 그에게 쏠린 기대를 생각하면 그것도 구차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한다면, 노씨와 그 주변은 몇 푼 되지도 않는 돈 때문에 도덕성이라는 귀중한 무기를 잃은 결과가 되지 않았을까.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사건 다음날 이렇게 논평했다. “대통령에게 강대한 권력이 집중되는 시스템하에서 사리사욕을 탐하는 세력이 지연·혈연을 이용해 대통령 주변에 접근하고, 가족 측근들도 온통 돈으로 오염되는 추태가 역대 정권에서 되풀이돼 왔다. 청렴결백을 표방한 좌파정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 보수파가 “기다렸다는 듯이” 진보세력의 도덕성을 냉소하는 그런 일을 허용해선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 구실을 주고 말았다. <요미우리신문> 사설은 이어진다. “노무현 전 정권 시대에 한일관계는 역사인식이나 다케시마(독도) 문제로 냉각돼 정상끼리의 셔틀외교도 중단됐다. 당시 한국은 일방적인 북조선 지원 쪽으로 기운 유화정책을 고집했고 그 때문에 일본·미국과의 안전보장관계는 삐걱거렸다. …노무현씨의 죽음은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여기엔 노 정권의 역사적 공적이 거꾸로 투영돼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역사인식 문제로 일본에 단호한 자세를 취한 것은 <요미우리>에겐 문제였을지 몰라도, 재일조선인뿐만 아니라 식민지주의와 싸워온 세계 각지의 사람들로부터는 큰 환영을 받았다. 남북관계에 대해 내가 만난 한국인들은 “더는 과거의 대립시대로 되돌아가진 않을 것”이라며, 지나치게 낙관적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밝은 표정이었다. 그런 급속한 시대변화를 일본 보수파는 즐기고 있다. 이 시대를 그런 식으로 지나쳐버려도 좋은 걸까?

     

    노무현씨는 호찌민만큼 청빈하진 않았고 다른 많은 정치지도자들만큼 낯 두껍지도 않았다. 그가 훌륭한 것은 자신의 실책과 약점을 인정할 줄 아는 정직성의 소유자라는 점이리라. 내가 그에게 공감하고 동정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다. 그도 마침내 어깨짐을 벗었다. 하지만 그가 벗어버린 어깨짐은 곧 다른 누군가가 지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짐에는 상처받은 도덕성의 재건이라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이 덧붙여졌다.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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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버스토리]우리는 기억하리라, ‘노무현의 가치’를

    2009 06/09   위클리경향 828호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서 장례까지 7일간의 기록



    노제가 열린 서울광장엔 50만 명 이상의 국민이 모여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저마다 고인에 대한 마음의 빚에 미안하고 안타까워 눈물을 흘렸다.

    광장이 열리자 검은 슬픔은 노란 물결로 승화했다. 수사의 칼날이 다가올수록 깊어졌을 그의 외로움을 위로하러 온 국민, 그가 마지막까지 하려 했던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는 국민들은 노란색 넥타이를 매고, 노란 풍선과 노란 모자로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새벽 5시 봉하마을에서 발인 후 5시간을 달려 경복궁에 도착한 시신은 서울광장 노제를 하고 수원 연화장에서 화장 후 다시 5시간을 달려 봉하마을 뒤 정토원 법당에 안치됐다.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은 49재가 끝나고 봉화마을 뒷산에 묻힐 예정이다.



    초혼가와 진혼곡, 진혼무가 이어진 서울광장 노제. 시인은 “일어나요 노무현”이라고 외쳤고, 50만 이상 모인 국민은 “노무현 대통령 사랑합니다”로 화답했다.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내 마음속 대통령, 노무현”을 외치는 국민의 눈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마지막 유언처럼, 고인이여 그렇게 강물처럼 흘러 흘러 잘 가시라. 훗날은 남은 자의 몫이리니….



    새벽 5시 봉하마을 빈소에서 발인식을 하기 위해 고인의 시신이 운구되고 있다.


    대한문 앞에선 시민장례위 주최로 시민영결식이 열렸다. ‘아침이슬’ 등 고인을 추모하는 노래가 이어졌다.


    가족만큼 가슴 아픈 사람이 있으랴. 평소 노 전 대통령이 아끼던 손녀들이 미망인이 된 권양숙 여사에게 “할머니 울지 마세요” 하며 안기고 있다. 할머니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경복궁을 빠져나온 운구차량이 서울광장으로 향하자 시민들은 안타까움에 오열했다.


    수원 연화장에서 운구 행렬을 기다리고 있는 추모객들. 노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화장 후 고향인 봉하마을로 운구됐다.


    시민추모위가 마련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분향소엔 매일 수만 명의 조문객이 찾았다. 밤이 늦도록 줄은 줄지 않았다.


    국민 모두 상주였다. 저마다 조문을 쓰고 조사를 읊었다. 시청역 주변에 국민들의 애도 글이 빽빽하게 나붙었다.


    그들은 기억하리라. 5월 서울의 밤을 잠재우지 않고 깨웠던 그의 유지를….


    국민들의 설움을 모르는 것일까. 보듬어 안아주어야 할 정부는 오히려 슬픔을 분노로 만들었다. 경찰이 추모객을 막는 모습.


    노모와 아들은 무엇을 보고, 또 무엇을 이야기했을까? 노 전 대통령을 보내는 설움에 남녀노소가 없었다.


    추모객들은 수천 마리 종이학을 만들어 그를 추모했다. ‘다 잊고 훌훌 가시라’는 염원이었다.

     
    Posted by 렛츠고
    ,
  • 09.06.05 20:38 http://cafe.daum.net/mindong1990/MnGi/31

    “바보 노무현 대통령님”을 쓰다 앙앙 운다 [2009.06.05 제763호]
    [표지이야기-눈물의 기억]
    서거일 5월23일부터 영결식 29일까지 ‘민장’ 상주들의 다큐 7일
    임인택 임지선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뙤약볕 아래 여고생 흐느낀다. 해거름 중년 남성 들썩이는 어깨 흐릿하고, 새벽 3시 또 다른 울음소리 찬바람에 흔들린다. 다시 땡볕, 운구차 화장길 떠나간다. 곡소리 먼저 타들어간다.

    “슬프다.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다.” 황지우 시인은 ‘뼈아픈 후회’라는 시제로 토로한다. 반도의 근대사에서 사랑을 받았다는 정치인이 단 한 명 있던가. 때론 표를 줄지언정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거나…. 5월의 덕수궁은 뼈아픈 후회들로 그렇게 들썩였고, 결결이 주저앉았다.

    » 5월27일 서울 견지동 조계사 분향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마음을 담은 글이 빼곡히 적힌 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봉하마을을 찾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말한다. “국민들이 제대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걸 부끄럽게 여기고 미안해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노 전 대통령을 다시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건 반토막 진실이다. 시민들은 유가족의 뜻과도 상관없이, 정부의 원천봉쇄를 뚫고 자신들만의 분향소를 덕수궁 앞에 차린다. 정부 지정 분향소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들이 실상 다시 알게 된 건, 비주류의 죽음으로 연명하는 주류 정치학의 폭력이다. 촛불만 켜지면 ‘잠정적 소요사태’로 규정하고, 상여마저 뒤집을 무자비 정치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분향소를 마련한 덕수궁 일대를, 영결식이 열리기까지 일주일간 배회했다. 회한은 자책에서 슬픔으로, 슬픔은 분노에서 증오로 치올라, 서울 복판은 내내 비등했다. 만나는 이마다 이름은 오열씨요, 분노씨다. 결국 애도문마저 격문과 구호가 되고, 고즈넉한 돌담길 두른 만장이 깃발 되어간다. 그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침묵의 민란이다.

    “조문하며 그분께 마지막으로 전한 메시지가 있습니까?”

    “다음 생에도 꼭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어달라고 말했습니다.”


    5월23일 밤 10시, 다음달 출산 예정인 만삭의 아내(33)를 데리고 온 한 남성(38·경기 고양시)은 한참을 담금질한 외마디를 뱉는다. 눈물을 흘리는 그는 5살 딸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묻고서 온전히 듣고 보기가 힘들다. 기자는 집에 돌아갈 때마다 저들의격정에 감전되듯, 녹초가 되어 쓰러진다. 이레 동안의 민장(民葬)은 그렇게 기록된다.
     

    5월23일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결국 또 그리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다시금 거리로 불러모았으니, 어쩌면 그가 저승에서도 갚지 못할 신세가 될 모양이다.

    대통령에 당선되던 2002년 겨울,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며 그에게 실망했다던 2003년, 그러나 탄핵은 안 된다며 100만 촛불을 들었던 2004년,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며 끝내 등을 돌리겠다던 2007년, 거리는 언제나 ‘노무현’을 불렀다. 퇴임 뒤 봉하에서도 그리 불러세웠다.

    “지난해 12월 봉하에서 따뜻한 봄날 다시 인사 나오시겠다던 그 말씀 끝으로 정녕 마지막 모습이 되었습니다. (당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많이 울었는데 이렇게 오늘도 많이 울리십니다.”

    대한문 앞 분향소 첫날, 굵은 펜 꾹꾹 눌러 조의록을 채운 맹미란씨에게도 노 전 대통령은 가늠 못할 신세를 진다.

    충격은 헤아릴 수 없다. 정부도, 어느 조직도 충격 대처 요령을 알리거나 위로하지 않는다. 이날 오전 김아무개(44)씨가 “오후 4시, 대한문 앞에서 추모를 위해 모이자”는 제안을 포털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에 올린다.

    한예진(18)양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친구가 보내준 휴대전화 문자로 (서거 소식을) 알게 됐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왔다”고 말한다. 자꾸만 흔들린다. 조문을 위해 달려온 최초의 여고생. 160cm가 안 돼 보이는 작은 체구에선 눈물이 쉴 새 없이 맺힌다. “그분 원래 안 좋아했는데…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거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경찰도 일찌감치 대한문 앞마당에 전경 40여 명을 심어뒀다. 도롯가는 전경차로 막았다. 예정했던 분향소는 30분이 지나 차려진다. 대신 경찰은 사방을 에워싸, 대한문 앞으로 추모객들이 진입하는 것을 원천봉쇄한다. 비 오면 어떡하냐며 들여놓으려던 천막은 진입 시도 2분 만에 경찰이 부순다. 서 울던 이들 나앉고, 비명을 지른다. “예우로 모신다며! 조문도 무섭냐, 이 ××들아.” “오늘은 조문만 할게요, 조문만….” 욕도 애원도 젖어 있다.

    오후 6시 남짓, 정동길 쪽은 전경 대신 버스 3대로 틀어막으려 한다. 전경단에 밀려 깔린 한여민(고2)양의 왼쪽 무릎에 핏빛이 든다. 그사이 서울시청역 쪽 전경 한 명이 서거 관련 호외를 읽는다. ‘울지 마라’ 지휘 명령이 없는 한, 그라고 왜 애타지 않고 충격이 없겠는가.

    저녁 7시 남짓, 광화문 방향 출구를 터주기까지 추모객들은 대한문 앞마당에서 병자인 양 격리되었다. 차라리 게토 안에서 자유롭다. 열 발톱에 연두색으로 화장한 젊은 여성도, “한 달 전 아버지의 죽음보다 더 충격적”이라는 40대도, “언론에서 600만달러 어쩌고 의혹을 키워서 노인들은 그게 600억원인 줄 아는 경우가 많다”던 78살 노인도 떨며 꽃 한 송이 놓는다.

    저녁 8시20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더 큰 영정이 도착한다. 달빛 아래, 그림자도 발 디딜 틈 없다. 어느새 10명씩 합동 분향을 한다. 더 크게 웃는 그 앞에서, 시민들은 더 크게 더 많이 운다. 그리 또 신세진다.


    » 시민 분향소가 차려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찰이 조문객 유입까지 원천봉쇄했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어떡하냐며 분향소 천막을 들이려던 노력도, 경찰이 낚아채 2분 만에 부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5월24일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필부들 맺힌 눈물방울에 2003년 5월25일이 비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보 진영과의 마찰에 “대통령 못해먹겠다” 말한다. 어쩌면 외로움이었을 테지만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조차 의심한다. “인간 노무현은 믿고 좋아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은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고, “권위주의적으로 변했다”며 탈퇴를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조차 참여정부 때 나선 시위가 가장 많다.

    정확히 6년이 지난다. 대한문을 찾은 한 여성은 “더 믿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말한다. 충격 뒤 자책은 죽순처럼 솟는다. 뿌리가 깊다.

    경기 광명에선 시장이 시민 분향소를 치우라 해 마찰이 일었으나, 그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지못미 신드롬’은 덕수궁을 지나 광주와 대구 시민 분향소도 건너고 봉하에 가닿는다. 덕수궁 돌담길, 서울시청역사, 대한문전 바닥에 가슴 치며 눌러썼을 조의문이 가득하다. 지못미, 지못미, 믿지 못해 미안해요….

    자책은 원망으로 이어진다. 5살 아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덕수궁을 찾은 강아무개(30대·서울 청량리동)씨는 말한다. ”우리나라 국민은 더 당해야 해요. 무능력한 것보단 낫다며 지금 정권을 뽑았잖아요. 그렇게 당하고도 몰라요. 정말 화가 납니다, 제 자신한테도.” 5월23일 오전 내 울었다는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기자 앞에서 펑펑 운다.

    대한문 영정 앞 국화꽃이 수북하다. 자원봉사자들이 추모객에게 나눠준다. 유족 없는 ‘장례’에 이날 하루에만 모인 조의금 400만원이 꽃값이고 물값이다. 분향 첫날, 국화가 부족해 두세 차례 사용되었을 뿐, 5월28일엔 1천만원이 답지한다. 지난해 넘쳐나던 양초의 출처를 캐물었던 이명박 정부는 유족과 협의해, 노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한다.

     

    5월25일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5월23일부터 매일 이곳을 찾는다는 이들에게 낮·밤 구분이 의미 없다. 북은 핵실험을 전격 강행했다. 산 자들의 ‘인정 투정’, 망자 앞 곡소리보다 크지 못하다.

    대한문은 분향소가 차려진 날부터, 경계란 경계는 모두 흐린 ‘개와 늑대의 시간’ 속에 있다. 낮·밤, 생사, 자책과 분노, 하물며 “<시티홀>의 김선아, 너무 재미있더라”며 조문하러 가는 20대 여성 둘의 폭 큰 감정선까지. 정동영 의원 지지 모임 회원인 이아무개(33·여)씨는 5월27일까지 모두 네 차례 대한문에 들른다. 조문만 두 번을 했다. 그는 “이틀을 안타까워만 하다, 깨고 보니 분노가 치민다”고 말한다. 이념과 지지의 경계도 흐릿하다.

    한밤 추모 행렬이 낮보다 길다. 밤 10시30분께, 서울시의회 입구에서 한쪽 추모 행렬의 끝이 겨우 보인다. 김기연(경기 남양주)씨와 기성태(서울 종로)씨가 양손에 촛불과 국화를 들고 줄 끝에 선다. 한 명은 지난 대선 때 “경제는 책임져줄 거란 생각으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 “뚜껑을 까보니 정말 실망스러웠다”고 하지만, 한 명은 “경제 잣대로만 투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선진국이 되긴 힘들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쉰 살, 그들은 친구다. 봉하의 자살은 이 사회 ‘쉰 살’이 따르기엔 지나치게 엄격한 순결일지 모른다. 둘은 “그의 죽음이 없었다면, 개인의 성찰이 이렇게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잊고 살던 ‘노무현’과 뒷짐만 지고 보던 ‘이명박’이 되살아난다.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그들은 조금씩 영정 앞으로 다가선다. 한발 두발 성찰 같다. 분향까지 2~3시간은 넘게 걸릴 거라 했더니, 김씨는 “오늘 회사에서 자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5월26일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불 속 회한이 광장의 민장을 통해, 성찰이 되고 바투 공분을 빚어내고 있었다. 서울시청역 지하보도로 이어진 추모 행렬은 맞은편 프레스센터 앞까지 닿는다. 땅 아래에서 국화꽃 들고 또 울고 있다. 지하 공간 인파는 제 몸의 열들로 숨이 막힌다. 6시간을 기다리고 헌화해야, 겨우 위로받을 울분들.

    경찰이 끌고, 정부가 부추기는 꼴이다. 전날까지 서울 전역에 104개 중대, 대한문에만 9개 중대가 배치됐다. 한승수 국무총리는 덕수궁 통제 이유로 소요사태 우려를 든다. 주상용 서울경찰청장은 “차벽이 병풍 같아서 더 아늑하게 느껴진다는 분들도 있다”고 말한다.

    슬픔은 증오로 적분된다. 전날부터 이명박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를 위한 서명이 본격화했다. ‘지못미’는 저마다 정치나 소외층에 무심했던 개인적 회한이지만, 증오는 그 틈을 악용한 일방통행 정부를 공식으로 겨눈다.

    한국에서 3년을 산 미국인 영어강사 조지프 리트(25)는 “전직 대통령이 자살한 일은 모든 시민의 큰 슬픔이다. 놀랍고 역사적인 일인데 경찰은 도리어 시민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고 말한다.

    밤 11시20분, 중년 남성 6~7명이 거칠게 내뱉는다. “서울역에 세운 건(정부 공식 분향소) 허깨비여~.” 군데군데 둘러서고 앉은 이들, 시국 토론 중이다. 서울시청역 1번 출구, 커다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이명박 데스노트 - 민주주의, 서민경제, 용산 철거민, 화물연대 노동자 박종태,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리고 ???, 다음은 당신의 이름일지 모릅니다….” 차마 다 읽지 못한다. 원망 말라던 영정 앞에서 자꾸만 싹을 틔우는 원망은 누구의 책임인가.

    » 지난 5월27일, 시민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려던 추모제가 정부에 의해 거부됐다. 대신 정동교회 앞 사거리로 옮겨 자발적 추모제가 진행됐다. 당국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회한이 이들에겐 뒤섞여 있었다. 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5월27일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새벽 2시, 30대 여성 둘이 1시간째 대자보를 쓰고 있다. 38살, 36살 올케 시누이 사이다. 1시간가량 기다려 조문을 마치는데, 누군가 대자보를 부탁했다 한다. “낮에는 국화, 밤에는 촛불로!” “이명박 정권 끝장내자, 5월 정신 계승하여 민주주의 사수하자! 제2의 6월항쟁의 횃불을 들자! 독재 타도!”

    이들은 “집단행동은 애도 기간이 끝나고 해도 괜찮지 않겠냐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며 “나도 이런 표현이 좀 그렇긴 한데, 다른 방식의 애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실상 전날 오후부터 많아진 문구들이다. 노조나 시민단체의 플래카드도 는다. 40대 남성은 자유발언을 통해 “울면 끝이냐. 이제 뭐든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외친다. “제 마음속에도 비가 내립니다. 사람 사는 세상 만드는 일 우리의 몫으로 알고 끝없는 부패 정권 단죄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조의록엔 ‘고2 김민규’가 적혀 있다.

    하지만 한목소리일 리 없다. 추모가 중반으로 접어들며, 국가 원수에 대한 예우로 대한문을 찾은 이도 상당수다. 무엇보다 김아무개(30·여)씨는 “지난해 ‘촛불’을 들었다 연행이 돼 추모 촛불을 드는 것도 무서웠다”고 말한다.

    늦은 점심을 먹고 줄을 서 헌화하면 이윽고 저녁 허기가 몰려온다. 자원봉사자들이 컵라면을 나눠준다. 아이 손에 쿠키칩을 쥐어준다.

    건장한 택시기사, 새벽 3시가 다 되도록 봉하마을 갈 승객들을 호객한다. 왕복 15만원이다. 김밥을 파는 김아무개(66)씨는 “어제 와서 추모하는데 김밥을 판다는 게 정말 민망했다. 하지만 장사하는 사람들은 또 그렇게 먹고살아야 하지 않냐고 해줘 기운이 났다”고 말한다.

    새벽 5시, 가로등이 꺼진다. 30분가량 지나자 퇴근길 조문이 출근길 조문으로 바뀐다. 네온사인도 하나둘 꺼지고 커다란 해 하나 촉광을 높인다. 위아래 하얀 옷을 걸친 김강석(45·서울 상계동)씨는 안개꽃을 들고 50여 명 줄의 끄트머리에 선다. 남대문시장에서 옷장사를 마친 뒤 꽃집이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오는 길이다. “퇴근길 택시비로 꽃을 샀으니, 이따가는 지하철 타야죠.”

    계속되는 삶, 그것만이 진리다. 하지만 이젠 어떻게? 분노는 폭발할 듯 끓지만, 풀 길을 알지 못한다. 그의 죽음이 ‘짐’처럼 남긴 숙제가 된다.

     

    5월28일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깊은 슬픔, 날선 분노는 구술되기 어렵다. 침묵은 길어지고, 말 대신 눈물로 다진 몇 글자 겨우 시청사, 대한문 앞 광장 바닥에 ‘시’가 되어 붙는다. 첫날부터 겹겹이 붙은 비문들로, 덕수궁 돌담은 거대한 비석이 된다. 13살 아이는 “바보 노무현 대통령님”을 쓰다 앙앙 운다. ‘미안 마라’ 하여 미안하고, ‘원망 마라’ 하여 원망스럽다.

    죽음이 시도 살린다. 일대가 ‘시의 광장’이다. 22살 여대생은 컴퓨터 프린터로 정결하게 글을 추려 덕수궁 돌담길에 붙인다. “무지한 제자들을 위해 몸을 던져 진실을 보여주신 것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저는 공부도 못하고 머리도 좋지 않지만, 적어도 깨어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의 영원한 대통령님, 나의 스승님.”

    “나 좀 치료해주세요. 머리가 텅 빈 것 같아요. 눈물이 계속 나와요, 목이 메어 숨을 쉴 수가 없네요, 가슴이 미어져 답답해요. 많은 조문객들 보면 미소가 나요. 난 요것으로 괴로운데 바보 노통은 천배, 만배 힘들었어도 주변분 걱정하셨네요.”

    5월26일 방송사는 29일까지 예능 프로를 모두 멈추겠다고 발표한다. 온라인 게임 회사는 게임 서비스를 잠시 중단했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사표를 냈다가 반려된다. 수감 중이던 강금원 회장은 울며 출소해 봉하를 찾는다. 시민들은 그게 자신들 ‘시’의 힘이라곤 생각지 못한다.

    이날 덕수궁 추모 인파는 50만여 명으로 그간 일일 최대치를 이룬다. 50만 시구가 더 붙을지 모른다. “이렇게 가실 줄 알았더라면 제 삶을 그리 탕진하진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살던 것을 리셋하고… 죽어서 당신을 만날 때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살겠습니다.”(유주영) 작은 비석을 세워달란 유언이, 거대한 ‘시의 민란’을 도발한 셈이다.

     

    5월29일 “운명이다.”

    오전 11시5분, 덕수궁에선 시민들끼리 따로 영결식을 연다. 정부가 주재하는 장례식을 거부한 셈이다. 노란 모자와 노란 머플러, 노란 풍선과 노란 종이비행기를 든 사람들로 서울시청 앞은 물든다. 운구차가 덕수궁을 지날 때 “나의 대통령”을 연호하며 울부짖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이다. 불볕에 눈물이 타들어가고, 그도 이미 화장된다. 경복궁에서 서울역을 이글거리는 거대한 민장이다. 공식 영결식 때 이명박 대통령이 등장하자, 덕수궁은 야유로 들썩인다. 곡소리는 ‘반정부’의 다른 말이다.

    시민단체는 전날 서울시청 광장에서 추모제를 열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하지만 5월29일 운구차가 서울을 빠져나간 뒤, 시민 추모객들은 마침내 서울광장 일대를 거대한 촛불로 뒤덮는다. 서거 이후, 사실상 지난해 촛불 정국 이후로도 처음이다. 두 가지가 보인다. 이제 ‘촛불’은 전통적 시민단체가 더는 주도하지 못한다는 것과 앞으로 촛불 또한 그와 무관하게 전망된다는 것이다.

    노제가 끝난 뒤에도 시민들은 대한문전에서 분향을 했다. 49재까지 지속될 참이다. 그때마다 촛불이 불탈지는 알 수 없다. 일주일 동안 100만 명 이상이 덕수궁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아프게 만났다. 시인 허수경은 ‘불취불귀’ 봄의 이별을 노래한다.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잘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하지만 제(祭)란 무릇 죽음과 삶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 이제 그를 놓아보내야 한다. 1980년 5월, 1987년 6월 그리고 또 오늘. 반도의 오뉴월은 분노의 계절이다. 슬픔의 계절이다. 반도의 민주주의는 오뉴월이 만들었다. 이제 연령을 넘고 시대를 넘어, 그 시절 동참했던 모든 이들, 잔인한 정권 앞에 눈물지었던 모든 이들을 ‘오뉴월 세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반도의 내일은 그들 손에 놓였다. 이제 추모는 끝나고 저마다의 ‘촛불’이 남는다. 그에게 바치는 수많은 ‘시’로, 이제 살아남은 자가 어둡고 어지러운 내일을 모색하는 다짐이 된다. 조종 소리 아직 들린다.

    자원봉사자들

    “봉사라도 해야 내가 살겠다”

    » 추모객들의 경향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중학생부터 노년들까지 다양하다. 여고생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상갓집에서 귀한 것은 일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5월23~28일 엿새간 2천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몰렸다. 상황실에서 자원봉사 접수 업무를 담당한 김공헌씨는 “신기하게도 사람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와 자리를 채워주고 있다”고 말했다. 봉사자들은 쓰레기를 정리하는 일부터 분향 절차를 안내하는 일까지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5월27일 덕수궁 돌담길 아래 홀로 말없이 앉아 국화꽃을 나눠주던 노정자씨.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네 살인 노씨는 토요일 아침 뉴스를 듣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봉사라도 해야 내가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날 아침 대한문 앞에 와 분향을 마친 뒤 상황실을 찾았다. “이 늙은 나도 뭔가 도울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국화꽃 나눠주는 일이 주어졌다.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지지했다는 그는 “이승만 때부터 지금까지 봐왔어. 무식한 나도 알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라며 분노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칠순의 나이에 힘들 법도 하련만 그는 “죽은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 일이 뭐가 힘드냐”고 말했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는 바람에 왼손과 왼발이 불편한 문아무개(50)씨는 서울 지하철 시청역 3번 출구 앞에서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5월25일부터 자원봉사에 나섰다. 분향하러 왔다가 시민들에게 물 나눠주는 일을 도왔는데 시민들이 물장수로 오인하자 아예 자원봉사 신청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게 너무 슬프고 분하다”는 그는 한쪽 팔로도 능숙하게 쓰레기를 정리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거 보면서 나도 뭐라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중학교 3학년인 최혜원·김예가·김지수양은 5월27일 자원봉사 활동을 두 차례나 했다. 오전 10시30분까지는 학교에서 쓰레기 줍기 자원봉사를 했다. 그러고는 교복을 입은 채로 대한문으로 향했다. 김지수양이 먼저 친구들에게 “대한문에 분향하러 가자”고 제안하자 두 친구가 따라나섰다.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가지 말라고 했다며 눈치를 봤다. 이들은 분향을 마친 뒤 “자원봉사 하실 분”을 찾는 외침을 듣고 곧장 상황실을 찾았다. 처음엔 조문객들에게 생수를 나눠주다 오후 들어서는 시민들이 접어놓은 종이학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땡볕 아래 앉아서 일을 하면서도 “힘들지 않다”고 했다. 학교에서 한 줄로 서 쓰레기를 줍는 자원봉사보다는 대한문 앞에서 땀 흘리는 게 더 의미 있는 봉사활동이라는 게 이들 삼총사의 생각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화보

    » 5월29일 오전 11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이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거행됐다. 이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노제가 끝난 뒤 만장을 든 운구 행렬이 서울역으로 향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yongil@hani.co.kr

    » 5월27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시민 추모제가 당국의 불허로 무산돼 정동교회 앞 사거리로 옮겨 진행됐다. 일부 시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을 앞세우고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경찰력에 막혀 무산됐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 5월2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가 끝난 뒤 시민들이 서울역으로 이동하는 운구 행렬을 보며 “노무현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 노무현 대통령 서거 6일째인 5월28일 오후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조문하기 위해 온 시민들이 노 전 대통령의 대형 걸개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 Posted by 렛츠고
    ,
  • 09.06.05 15:40 http://cafe.daum.net/mindong1990/MnGi/30

    그들은 '제2의 노무현' 탄생이 싫었다
    [주장] 기득권 세력에게 '집단 괴롭힘' 당한 대통령
    09.06.04 13:41 ㅣ최종 업데이트 09.06.04 22:11 이종필 (ststnight)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고 국민장이 끝난 지금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전대미문의 정국으로 빠져들고 있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이미 지나간 일로 짐짓 모른 체하거나 들불처럼 번진 추모열풍을 '미친 바람(광풍)'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다. 보수언론은 노무현의 자살을 개인과 가족의 비리로 인한 단순자살로 평가하며 검찰 수사의 정당함을 옹호하기에 바쁘다. <조선일보>는 6월 4일자 사설에서 시국 선언문을 발표한 서울대 교수들의 법적·도덕적 하자를 비판했고, <중앙일보>는 같은 날 칼럼에서 국회가 힘을 키워 대통령에 대항하라는 해괴한 주문을 내놓았다.

     

    다른 한쪽에서도 노무현 서거 이후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고민이 많아 보인다. '친노는 무엇을 할 것인가'부터 '한국사회가 노무현의 유산을 어떻게 이어받을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산법이 저마다 다르다.

     

    '집단 괴롭힘' 당한 대통령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이 열린 29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노제를 마친 운구행렬이 서울역을 향하는 가운데 수많은 시민들이 만장과 노란풍선을 들고 따라가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권우성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그러나 이 모든 논의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 어디를 보아도 노무현과 검찰, 노무현과 이명박, 노무현과 조중동의 대립이 있을 뿐이다. 현상적으로는 이런 관찰이 전혀 틀리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보려면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이면을 한번 들춰볼 필요가 있다.

     

    많은 국민들은 노무현의 자살이 현 정부의 핍박과 검찰을 앞세운 정치적 보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자살이 억울하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에 수백만이 빈소를 찾았다. 사실 노무현에 대한 핍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무현은 국회의원 시절에도 핍박을 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는 본격적으로 '이지메(집단 괴롭힘)'을 당했다. 대통령 중심제에서 현직 대통령이 이지메를 당하는 현상은 쉽게 상상하기 어렵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우리 모두 목격자다.

     

    노무현은 야당 뿐만 아니라 조중동과 싸웠고 검찰과 싸웠고 군인과도 싸웠고 고위 공직자들과도 싸웠다. 심지어는 집권당과도 싸웠다. 한마디로 노무현은 한국 사회의 그 모든 기득권 세력들의 집단 괴롭힘을 한몸에 받았다. 퇴임한 뒤에도 아방궁 논란부터 기록물 유출, 논두렁에 버렸다는 1억원 시계까지 언론과 국가기관을 동원한 그들의 이지메는 그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너무 뻔한 질문인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의 기득권이 노무현을 싫어했으니까 그랬겠지. 노무현이 개혁적이고 잘 타협할 줄 모르고 원칙을 강조하고 입바른 소리만 하고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만 앞세우니 기득권이 좋아할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이 뻔한 질문과 이 뻔한 모범답안에 의문을 던진다. 정말 노무현 '한 명 때문에' 그랬을까?

     

    누가 '잃어버린 10년'을 말하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서 나는 한국의 보수 세력들이 말했던 '잃어버린 10년'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10년을 잃어버렸고, 경찰은 시위대를 한껏 두들겨 팼던 10년을 잃어버렸고, 대기업은 무분별하게 탈세하며 사업을 확장했던 10년을 잃어버렸다. 보수언론은 세무조사 받지 않고 기사를 마음대로 썼던 10년을 잃어버렸고, 정치인들은 마음껏 돈다발을 뿌리고 다녔던 10년을 잃어버렸고, 군인은 아무 생각 없이 태평스럽게 국가안보를 남의 나라에 맡겨 놓은 10년의 좋은 세월을 잃어버렸다.

     

    ▲ 노무현 전 대통령(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국민이나 국가보다 자신과 조직의 이득만 챙겼던 고위 공직자들에게도 지난 10년은 자신들의 경력 속에서 잃어버린 10년이었을 게다. 한마디로 이들에게 지난 10년은 악몽이었을 게 분명하다.

     

    김대중 대통령이야 나름대로 오랫동안 정치를 해 왔기 때문에 그런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한없는 천민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이 입바른 소리만 해대며 훨씬 더 직설적으로 원칙과 기본을 강요했으니 그 언짢은 기분이 짐작은 간다.

     

    하지만 내 생각에 한국의 기득권이 정말로 두려워했던 사실은 노무현이라는 한 당돌한 정치인의 대통령 당선 자체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두려워했던 점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에서는 언제 어느 때라도 노무현 같은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갑자기 대통령이 돼서 자신들의 기득권에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제도적인 개연성과 다이나믹 코리아로 대변되는 한국사회의 역동성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대통령은 5년에 한 번 바뀐다. 아무리 선거 기간 공을 들이고 심지어 무리수를 쓴다고 해도 1997년이나 2002년처럼 기적 같은 역전극이 벌어질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나 같은 공화주의자에게는 이 가능성이야말로 민주공화국의 최대 장점이지만 잃어버린 10년을 아쉬워하는 이들에게는 '엄한 놈'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구조적인 개연성이 무척이나 성가셨을지도 모른다.

     

    일제시대부터 따지자면 근 100년 가까이 떵떵거리고 잘 살아왔는데 이제는 5년마다 마음을 졸이고 살아야 한다면 그 마음이 편치는 않을 터이다. 노무현 5년 동안 한국의 기득권이 뼈저리게 경험한 교훈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이 노무현을 집단적으로 괴롭힌 근본적인 이유는 노무현 개인 때문이 아니다. 어차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니까 선거제도를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노무현 같은 성가신 존재가 대통령에 오르지 못하도록 실효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방법이다. 즉 그들은 제2의 노무현이 출현할 가능성을 실질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방법으로 노무현 죽이기에 나선 것이다. 특히, 어떻게든 노무현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제2의 노무현' 탄생을 두려워했던 그들   

     

    이문열의 단편소설 <칼레파 타 칼라>는 보수 기득권의 이런 논리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은 고대 그리스의 한 도시국가에서 일어난 혁명 상황을 묘사한다. 사회적 불만이 우연적인 요소를 통해 폭발하여 혁명에 성공하지만 곧 혁명세력들이 이전의 부패세력과 비슷해진다는 요지의 내용이다. 혁명이라는 걸 해 봐야 결국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이른바 혁명적 허무주의의 대표작이다.

     

    혁명적 허무주의가 매우 위험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미래의 확실하지 않은 상황 때문에 현재의 사회적 모순이나 악을 방치하게 된다. 둘째, 현재의 개혁세력을 미래의 부패세력으로 미리 범죄시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너도 권력을 갖게 되면 똑같아질 것"이라는 비아냥이 대표적인 사례다.

     

    '노무현 집단따돌림'의 근본적인 목표는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노무현 개인을 정치적으로 응징하고 보복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국회에서 탄핵받고 쓸쓸히 퇴장하는 노무현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검은 돈을 받아 수의를 입고 포승줄에 묶여 수갑 차고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는 노무현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 한 장의 사진은 단지 개인 노무현의 위법이나 부패나 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30일 오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대국민 사과의 말을 한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유성호
    노무현검찰소환

    누군가 노무현의 뒤를 따라 한국 사회를 개혁하겠노라고, 반칙과 특권을 없애겠다고, "그저 밥이나 먹고 살고 싶으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저질러져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하면서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주목하면서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 할 수 있고 떳떳하게 무리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고 또 누군가 소리껏 외친다면 그때 그들은 제2의 노무현에게 수의 입고 수갑 찬 노무현의 사진 한 장을 보여줄 것이다. "결국 너도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어차피 누가 되든 결국에는 다 똑같아질 것이라면 그냥 지금 힘이 센 사람을 찍으라는 논리는 힘을 얻는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에게도 이런 심리가 어느 정도는 작용하지 않았을까.

     

    기득권의 공작은 당연히 노무현 개인에게 머무르지 않았다. 싹수가 보이는 인재들은 가차없이 초기에 싹을 잘랐다. 유시민을 비롯한 젋은 386들이 부당하게 언론의 십자포화를 맞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번은 청와대 386 참모들이 소주 대신 양주만 마신다고 도덕성에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주요하게 보도되기도 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제거했던 경험이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정조 이래 세도정치 동안에는 똑똑해 보이는 왕가의 사내들이 암암리에 납치되거나 암살되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 구체적인 증거를 나는 찾을 길은 없으나 이하응이 대원군이 되기 전에 목숨 하나 부지하려고 거렁뱅이 한량 노릇을 했던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것만으로는 불안했던지 보수 기득권은 자신들의 사회지배를 좀 더 확실하게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방편도 강구했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방송법이 대표적인 예다. 2002년 대선 패배의 원인을 방송 미디어 장악 실패에서 찾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재벌과 보수언론에게 보도채널을 안겨주려 한다는 이야기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사장 하나 바꿨을 뿐인데 1년 만에 KBS가 이렇게 바뀔 수 있느냐는 시청자들의 볼멘 소리는 방송법 개정 뒤의 한국 사회를 가늠하게 해 준다.

     

    기득권 세력은 공화국의 진실이 불편하다

     

    아마도 노무현은 5년 내내 아니 일생을 그들과 싸우면서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탄핵이 두려워 불의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 실체적 진실과는 상관없이 수의 입고 수갑 찬 모습, 그 모습이 개인 노무현 한 명의 굴욕과 불명예로만 기록된다면 노무현은 타협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6대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은 결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자살로 내몰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오랫동안 잊혔던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1항. 이 뜻이 궁금하면 그 다음 항을 보면 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주권자인 이 땅의 국민이 곧 대한민국 권력의 원천이요 주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 같은 상고 출신도 지고지순한 서울대 출신을 누르고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한민족 5천년 역사에서 노무현 같은 천출이 최고의 권력자에 오른 예는 일찍이 없었다. 이것이 이 땅에 공화국 정부를 세운 보람이 아닐까?

     

    그러나 한국의 기득권 세력은 공화국의 진실이 매우 불편할 것이다. 돈 많은 재벌 회장님들은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실형을 살지 않아야 하고 상고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며 힘없는 철거민들은 공권력에 타살을 당해도, 그냥 자살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 그 어느 누구도 이제는 더 이상 갑자기 대통령이 돼서 자신의 아성을 위협하지 않아야 하고 그런 싹들은 시위자의 마스크를 벗겨 발본색원해서라도 잘라야만 한다.

     

       
    29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진행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 노제에서 한 추모시민이 노무현 전 대통령 초상화를 들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노무현

    노무현이 순순히 그들의 각본을 따랐다면 가장 훌륭한 실패의 본보기로서 전가의 보도가 되었을 것이다. '마치 국정을 잘못 운영한 것처럼 비판받고 지인들에게 돈을 갈취하고 부정부패를 한 것처럼 비치는' 그 모습 그대로 말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자살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노무현은 자신의 자살로 그 길을 잠시 막아 놓았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고인의 유서를 보면서 나는 충무공의 사즉생 생즉사를 떠올렸다. 기막히게도 모순적인 2009년 한국의 상황에서 노무현의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한국 민주주의의 몰락을 잠깐이나마 저지하는 버팀목이 되어 버렸다.

     

    보수언론은 죽음 초기부터 노무현을 자살로 내몬 자신들의 집단 괴롭힘에 대해서 비켜갔다. 검찰과 맺은 악연이니, 승부사의 인생역정이니, 무거운 수사 중압감이니, 넘쳐나는 추모물결이니 하는 건 죄다 사건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들이다. 모든 내용은 노무현 개인의 문제로 환원된다.

     

    그러나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한다.  자살로 내몰린 노무현은 곧 참살당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또 다른 모습임을.

     

    이런 까닭에 지금 우리는 노무현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어떤 의미인가, 또 그의 유산은 무엇인가만을 따지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다. 아직 우리가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건희는 면죄부를 받았고 용산에는 용역이 들이닥쳤고, 방송법은 통과를 눈앞에 두고 있다.

     

    노무현이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지키고자 했던 것이 있었다면, 그토록 그가 사랑했던 조국의 민주주의가 아니었을까?


  • Posted by 렛츠고
    ,
  • 09.06.05 06:52 http://cafe.daum.net/mindong1990/MnGi/28

    노무현을 죽인 '新5적'은 누구인가?

    [홍성태의 '세상 읽기'] 민주주의의 위기를 직시하자

    [프레시안] 기사입력 2009-06-04 오전 9:59:07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변화를 촉구하는 시민들의 요구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어떤 변화도 거부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면 전환을 위한 개각은 하지 않겠다는 황당한 국면론을 펴면서 임채진 검찰총장의 사표를 다시 반려하겠다고 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바람 분다고 우왕좌왕해서는 안 된다는 희한한 바람론을 펴면서 한나라당의 쇄신에 대한 요구를 무시했다. 어쩐지 엄청나게 거대한 불도저가 불에 타 죽은 시체들이고 바위에 떨어져 죽은 시체고 할 것 없이 그냥 깔아뭉개고 가던 길을 계속 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직전 대통령이 퇴임한 지 불과 15개월만에 처절하게 자살하고 말았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보면서 일부 '우뻘'을 빼고는 누구나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대응을 보면서 또 다시 참담한 심정이 드는 것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죽은 것은 안 됐지만 자기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죄를 은폐하기 위해 자살했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다수 국민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에 의해 정치적으로 타살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정황은 아주 많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서는 특별검사와 국정감사를 통해 심층적으로 조사해야 한다. 특히 다음의 5대 사안이 중요하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상징되는 민주주의의 위기에 눈물만 흘려서는 안 된다. 이 눈물의 원인을 제대로 밝히지 않고서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프레시안

    첫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그에 대한 검찰의 부패 혐의 수사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따라서 검찰의 수사가 과연 정당했는가에 대해 심층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검찰은 아무런 증거도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뇌물범으로 기소하겠다고 공공연히 발표했다. 이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자살로 몰아넣은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다.

    만일 검찰의 주장이 옳은 것이었다면, 그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치른 것은 국가적 잘못이 아닐 수 없다. 검찰은 수사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국민장이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뇌물범을 국민장으로 예우할 수 있는가?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 그렇지 않다면 검찰에 대한 대대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 핵심은 대검 중수부의 폐지와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의 신설이다.

    둘째,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박연차 회장에 대한 국세청의 특별세무조사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기업순위 620위인 부산중소기업에 대해 서울에서 조사관을 관광버스로 특파해서 급작스럽게 특별세무조사를 벌인 배경은 대체 무엇인가? 이에 대해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정치적인 차원에서 기획조사를 한 것이고, 이 때문에 현재 미국으로 기획출국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한상률을 즉각 소환해서 심층적인 조사를 해야 한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국세청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정권이 바뀌자 곧 자신을 임명한 정권을 향해 칼날을 겨눈 자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 점에서 그는 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임채진 검찰총장과 너무나 닮았다. 한상률에 대한 조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둘러싼 의혹을 밝히기 위한 핵심이다.

    셋째, 경찰의 행태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경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는 것조차 강력히 억압하고 훼방하고 있다. 경찰의 행태를 보노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추모하는 것이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다. 경찰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서울광장을 '닭장차'로 둘러싸서 시민들이 왕래하지 못하도록 하는가? 경찰은 도대체 어떤 법률에 의거해서 시민들이 전철역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가?

    경찰의 행태를 보면, 지금 이 나라는 확실히 5공화국으로 옮겨간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과 전두환이 친해서 경찰이 이렇게 5공화국처럼 행세하는 것인가? 경찰은 대한문 앞 분향소를 대대적으로 파괴하고는 의경의 잘못이라고 주장해서 애꿎은 의경을 정권의 개로 만들고 있다는 비판마저 받고 있다. 이 한심한 반민주적 행태에 대해 반드시 심층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넷째, 조·중·동·KBS의 보도에 대해서도 심층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조·중·동·KBS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욕설이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악의적인 보도를 일삼았다. 특히 <조선일보>는 아예 '박연차·노무현 게이트'라고 꼭지의 제목을 뽑아서 계속 보도했다. 이런 식이라면 '박연차·이명박 게이트'라고 해도 될 것이다. 박연차는 천신일과도 아주 친했고, 천신일은 이명박 대통령의 후원회장이었기 때문이다.

    보수 언론은 흔히 인터넷의 익명 폭력이 연예인을 죽인다고 비난을 퍼붓는데, 보수 언론이야말로 엄청난 실명 폭력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이고자 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보수 언론의 문제는 '보수'가 아니라 '왜곡'에 있다. <조선일보> 신경무의 만평은 그 좋은 예이다. 이 점에서 KBS가 조·중·동과 한 패가 된 것에 크게 주의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이런 여러 문제들이 과연 각 주체들의 주체적 판단과 자발적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었을까?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여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실제로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부패 수사에 예외는 없다는 식으로 검찰의 과잉 수사에 대한 지적을 묵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주변과 가족은 물론이고 노무현 전 대통령 자신을 뇌물범으로 기소해야 한다는 의지는 누구보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은 모두 깊은 충격과 슬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은 그가 죽기 전이나 죽은 후에나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지 않은가? 처절히 파괴된 분향소가 진실을 참담하게 증언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너무도 큰 충격이고 고통이다. 이미 작년 봄부터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얘기하기 시작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이것을 적나라하게 증명해주는 것 같다. 보수 세력은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것조차 폭력으로 억압하려 하고 있다. 이런 행태 자체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증명하는 생생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보수 세력의 문제를 다시금 잘 보여주고 있다. 보수 세력은 여전히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인 것이다. 그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는 오히려 그에게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퍼붓고 있다. 다시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 깊이 탐구해야 할 때가 되었다. 민주화의 민주화라는 영속적 민주화의 관점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정말 실증적으로 천착해야 한다.

     

    /홍성태 상지대 교수·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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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9.06.04 11:20 http://cafe.daum.net/mindong1990/MnGi/27

     

    순응주의 시대는 갔다


                                                         
    민 병 욱(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이젠 냉정하게 짚어 생각해보자. 노무현전대통령의 죽음과 그 후 전개된 사태까지를 관통하는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찾기 위해 얼마만큼 노력하고 있는가. 특히 언론은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캐내고 밝히기 위한 공론(公論)의 장을 제대로 마련해주고 있기나 한 것인가.

    지난 국민장 기간 동안 TV와 신문들은 따라가기도 숨이 벅찬 ‘사실’들을 끝도 없이 쏟아냈다. 분향소마다 넘치는 추모인파 보도가 1주일 내내 이어졌다. 노전대통령의 인생역정과 퇴임 후 고향 집 삶도 눈에 선하게 그려냈다. 어린 손녀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씽씽 달리던 전직 대통령 할아버지 영상을 보며 국민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추모열기가 뜨거워지자 추모보도가 늘었고 보도물량이 늘자 열기가 더욱 고조되는 상승작용이 일어났다.

    언론, 심층 분석이나 본질 접근에 소홀


    그러나 그 정도였다. 사실은 차고 넘칠 정도로 나열했으되 그 안에서 진실을 찾아내기는 힘들었다. 역사상 예()를 찾을 수 없는 직전 대통령의 투신이 왜 일어났고, 또 그런 비정상적 죽음에 역사상 예를 찾을 수 없는 추모인파가 몰린 건 무엇 때문인지 언론은 제대로 분석하고 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언론은 장례식도 끝났으니 슬픔은 역사 속에 묻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의례적으로 정치계에 원인 분석을 요구했지만 진실추구를 제일의의 목표로 삼아야할 언론치고는 참으로 해괴한 주문이었다.

    물론 ‘죽음의 진실’은 쉽게 밝혀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죽은 이는 말이 없고 스스로를 죽일 때의 번민은 더욱 알 길이 없다. 유서를 통해 세상에 남기려는 뜻을 전했다고 보아야 옳겠지만 그런다고 죽음에 이른 진실이 완벽하게 재구성될 수야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상황과 사실(팩트, fact)의 얼개 안쪽에 숨은 진실, 아니 그 한 끄트머리라도 잡아보려고 노력할 책무가 언론과 언론인에게는 있는 것 아니겠는가.

    엄청난 추모인파 속에 숨은 진실도 마찬가지다. 국민장 기간 동안 전국엔 수백 개의 자발적 분향소가 생겼다. 덕수궁 앞에는 가로수 밑동마다 촛불과 영정이 놓였다. 봉하 마을에선 분향을 끝낸 수천 명이 자원봉사에 나섰다. 수백만 명이 국화를 올리고 향을 피우고 눈물을 흘리고 통곡했다. 수천, 수만 개의 노란 풍선과 노란 종이비행기가 운구행렬 위로 날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가능한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한마음 한뜻으로 추모의 대열에 동참하게 만들었을까.

    언론이라면 흥분하고 궁금해 할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우리 언론은 그 일의 전문가적 분석이나 본질의 접근에 소홀했다. 아니, 하려고 하지 않았다. 신문들은 그 흔한 여론조사 한번 안했고 방송 역시 흔하디흔한 전문가 토론 프로도 편성하지 않았다. 다만 단편적 느낌이나 감으로 ‘현 정권의 잘못된 국정운영 방식에 대한 반감, 분노’ 나 ‘정치탄압에 몸 던져 항거한 전직대통령에 대한 동정 ’, ‘그의 업적과 개인적 성정, 매력의 재발견’ 등이 추모열풍의 본질인 것 같다고 보도했을 뿐이다.

    입을 닫지는 않겠노라는 처연한 결기


    그런 단편적 분석들은 아마 하나하나가 다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왜 공론화를 통한 종합적이고 치밀한 분석과정을 거치기보다 기자나 앵커의 단발성 멘트 정도로만 전달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다. 또 그런 단편적 분석조차도 ‘이제는 화내거나 원망하지 말고 용서하고 화합하자’는 주류언론의 대승적(?) 주장에 덮여야 하는지를 많은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더 많은 성찰과 더 많은 공론, 더 많은 고민, 더 많은 진실 추구의 노력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런 연유로 나는 앞으로 있어야할 공론 무대에 이런 명제를 던지고 싶다. 이번 추모 열기는 촛불정국 이후 우리 사회에 퍼진 순응주의가 이제 끝났음을 선언한 국민의식이라고 말이다.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면 질서나 체제를 깨트리는 행위로 비난 받을까 두려워 입을 닫았던 이들이 이제는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고 처연한 결기를 다진 결과라고 말이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할 일은 앞으로 다시 않겠다는, 그래서 표현의 자유를 지켜나가겠다는 의지가 분명해졌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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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민병욱
    · 한국간행물윤리위원장
    · 전() 동아일보 정치부장 논설위원 출판국장
    · 저서: <들꽃길 달빛에 젖어>(나남출판,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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