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솔직히 한때 장하준 교수와 장하성 교수를 자주 혼동했습니다.  장하성 교수는 예전에 정책연구 관련 시민단체의 편집일을 하는 동안 원고를 청탁하느라 몇 차례 면식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이 분이 경실련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시면서 삼성의 에버랜드 편법 증여 등에 대한 고발 및 대기업 소주주 경영 참여 운동 등을 할 때 그 이름이 종종 언론지상에 거론되었기 때문에 조금은 아는(?) 사이였죠... 그런 인연 때문인지, 장안에 국방부 금서 목록 1호로 장 모 교수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란 책이 꼽혔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저는 장하성 교수님이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을 썼나 보구나 하고 생각했더랬습니다...

아무튼 그만큼 경제 분야에 대해서라면 학문적 논리든 실물 정책이든 별 관심 없이 살아왔지요. 그런데 이전 직장의 경영지원실에 계신 동료 팀장님과 식사 자리에서 추천할 만한 책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우연히 장하준 교수님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그 팀장님 왈, [쾌도난마 한국경제]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저자가 장하준이란 분으로, 자신이 보기에 세계경제 흐름 속에서 한국경제의 위치를 이 분만큼 제대로 짚어내고 있는 분은 없는 것 같다는 평과 함께 장교수님이 쓰신 책을 몇 권 추천해 주시더군요.  사실 그때서야 비로소 장하준과 장하성이 다른 사람이었구나 하고 머리 속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러고서도 근 1년 여가 흐른 지난 주말에서야 드디어 문제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읽었습니다. 물론 장하준 교수님이 쓴 여러 권의 책 중에서 제일 먼저... 책의 부록으로 함께 수록된 2시간짜리 강연 및 질의응답 DVD 동영상을 통해 화면으로나마 장교수님의 얼굴도 처음으로 제대로 접했습니다. 책에서 풀어내는 상당히 공격적인(?) 논리에 비해서 인상은 매우 온화하고, 시민운동가 혹은 투쟁가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더군요. 그냥 수수하고 수더분한 학자풍이고, 그냥 깔끔한 교수 스타일이더군요...

책의 논리가 공격적이라 한 것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이 책에서 이른바 '나쁜 사마리안'으로 '신화 혹은 미신(Myth)'을 퍼뜨리고 있는 주범으로 공격 받는 '자유무역 신봉론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격적이겠지만, 정작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되고 있는 개발도상국의 농민이나 민중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유있는 항변'에 가까우므로 내용적으로는 '방어적이거나 변호적'이라고 해야 맞을지도 모르니까요...

80년대 우루과이라운드로 국내 농산물 시장이 개방된 이래 21세기를 맞은 지금까지 근 20여년 동안 전세계를 풍미하며 작년 말 미국발 전 세계 경제위기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좀처럼 흔들릴 것 같지 않던 이른바 "세계화 대세론자"들의 "신자유주의" 경제론에 대해 여태 속 시원한 반박논리나 대안을 접해보지 못해 무척이나 답답해했던 저에게 이 책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마치 제 자신의 지적인 게으름을 꾸짖고 있다는 느낌을 먼저 받았습니다.

신자유주의의 허구성에 대한 반론이나 대안이 없기는 커녕,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시종일관, 줄기차게 신자유주의자들이 믿어의심치 않는 자유무역, 자유주의, 세계화의 윈윈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역사적 사실 자체를 자의적으로 왜곡한 논리인지를 이토록 명쾌하게 반박한 자료집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제 자신의 무관심했던 나태함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지요...

한편으로는 무관심이었을 터이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도 이미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으로, OECD의 일원국이 되었다는 데서 오는 자만심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의 하나로 불리는 것은 이제는 왠지 합당치 않다는 느낌, 그래서 선진국(!)들이 주장하는 자유시장 논리를 우리 또한 적극 수용하고 펴야만 하는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겠지요...  

"자본주의 비사와 자유무역의 신화(The Myth of Free Trade and Secret History of Capitalism)" 라는 책의 원래 부제가 말해주듯이 이 책 "나쁜 사마리아인들(BAD SAMARITANS)"은 17세기 이래 자본주의 선진국이라 불리는 영국과 미국을 비롯해 유럽이나 일본, 그리고 한국이나 여타 나라들이 어떤 방식을 통해 자본을 형성하고 기술과 부를 축적하면서 자국의 산업을 발전시켜 왔는지를 "국제교역"에서의 자유주의 또는 보호주의라는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파헤칩니다. 

무엇보다도 전체 380여 쪽의 책 분량 중에 50쪽이 본문에 수록된 각종 데이터 및 인용문들에 대한 원전 참조문헌의 목록과 상세 각주로 채워져 있어 우선 놀랐습니다. 마치 졸업용 석박사 학위 논문을 연상시킬 만큼 풍부한 문헌 자료와 세세한 수치 인용을 보면서, 무릇 자신의 논리를 세상에 펼치고자 하는 학자라면 최소한 이 정도의 기초연구와 사실(Fact)에 대한 추적이 있어야만 다른 학자들이나 반대론자들과 맞설 수 있겠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더군요.

국내 학자들의 여러 논문들을 통해 데이터나 문헌 인용시 남들이 베낀 것을 또 베끼는 식의 천박함을 적지 않게 보았던 터라,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가 갖는 논쟁의 첨예함에 걸맞을 만큼 가히 대단한 역작의 하나라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이러한 저작방식 속에서, 해외에서 영어로 된 원서를 먼저 출판한 다음 이것을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 출간하는 장하준 교수 특유의 고집스런 출판 방식 속에 숨어 있을 법한 나름의 이유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놀란 것이라면, 제가 온라인으로 주문해서 받은 이 책이 2007년 10월 10일 초판 1쇄 발간 이래, 2009년 6월 10일 기준 초판 100쇄라는 사실입니다.  출판 실무를 자세히는 모르고 또 요즘은 디지털 조판시대라 예전의 활판 인쇄 시절과는 또 다르겠지만, 통상 우리나라에서 1쇄를 찍는다 하면 2천~3천권을 찍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00쇄라면 대략 30만권 정도가 찍혀서 팔려 나갔다는 뜻일 겁니다. 소설도 아닌 경제서적, 특히 국제교역 이론을다룬 경제사 혹은 국제경제학 개론에 가까운 책이 불과 2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자그만치 30만권씩이나 팔릴 정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면 이것은 단지 국방부 불온서적 리스트로 올려지는 바람에 일반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덕분이라고만 설명하기에는 설득력이 한참 모자랍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아무리 유명한 필자들이 책을 쓰더라도 경제 경영 분야의 전문서적인 경우 초판 1쇄도 다 팔리는 경우가 그리 흔치 않은 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나쁜 사마리안]을 국내 초베스트셀러로 만들게 한 힘의 원천일까요? 제 생각으로는 무엇보다도 역사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분석, 그리고 그 역사를 바라보는 저자의 진실된 시각이 주는 공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책은 독자들이 딱히 높은 수준의 경제학적 식견이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냥 일반인들이 보더라도 누구나 충분히 수긍할 만한 역사적 사실들을 비교적 평이하게 나열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그 사실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한 저자의 철저한 논증과 분석의 칼은 결코 무디지 않습니다. 게다가 아주 적절하고 재미난 비유가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노엄 촘스키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셉 스티글리츠 같은 대가들이 이 책을 자본주의 역사의 진실을 배우고 세계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정립하는 데 꼭 읽어야 할 명저로 극찬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나라가 부자가 되려면"이라는 플로로그와 "세상은 나아질 수 있을까?"라는 에필로그로 글을 시작하고 또 맺습니다. 그리고 이들 장에서 필자는 2061년 6월 28일자 더 이코노미스트지, "모잠비크, 세계 초일류 기업에 도전하다!"라는 가상의 기사와 "상파울로 2037년" 이라는 소제목 하에 브라질의 장래에 있을 법한 가상 시나리오를 제시함으로써 우리의 기존 상식과 상상력의 한계에 대해 일침을 가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해당하는 아홉 개의 장을 통해서, 세계화를 이해하는 관점(시각)의 문제, 부자나라들이 실제 부자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자행했던 실제의 역사, 자유무역은 과연 정답인가, 외국인 투자의 허와 실, 효율을 위한 경쟁의 도입과 민영화 논리의 맹점, 지적재산권의 보호가 갖는 사회적 비용(소비자 불만)의 증대 문제, 국가(정부)의 적자 재정 편성과 IMF 정책 권고의 문제, 부정부패 및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의 상관성, 그리고 국가별 문화적 기질의 차이, 이른바 '민족성'이나 '국민성'이 과연 경제 발전을 규정하는가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경제 발전과 관련된 각종 논리들에 대해 그 허구성을 드러내고, 신화(미신)적 요소들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조목조목 들춰가면서 저자 자신의 논지를 일관되게 펼쳐 나갑니다.

각각의 장에 대해 그 내용을 일일이 요약할 필요는 없을 것같습니다. 본문의 내용이나 책의 전개방식이, 굳이 어려운 논리나 수사를 펴가면서 현학적으로 자신의 논리를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저 과거 선진국들이 오늘날의 경제를 이룩하기까지 취했던 각종 경제 정책이나 이론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면서 실제로 작금 세계화 지지론자들, 혹은 신자유주의 숭배자들의 논리가 얼마나 역사를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는지를 낱낱히 설명하는 자료들의 집합본일 뿐이니까요...

때문에 아홉 개의 장을 모조리 한꺼번에 읽어야 할 필요도 없고, 개별 주제에 관심이 없으면 건너 뛰면서 흥미 있는 부분만 읽어도 각 장의 테마나 저자의 논지를 이해하는 데 그다지 문제될 것도 없어 보입니다.

여러 장면에서 촌철살인에 가까운 비유와 적절한 반론 데이터들을 접하게 되지만 특히나 "미션 임파서블?-재정 건전성의 한계"로 이름 붙인 7장에서는 저자가 이른바 "나쁜 사마리안"이라 통틀어 말하는 "사악한 삼총사" -- IMF와 세계은행, WTO-- 들의 만행을 고발합니다. 즉, 이들이 개발도상국이나 금융위기에 봉착한 나라들을 대상으로 돈을 꿔주는 명분하에 해당 국가의 경제 정책이나 재정정책을 좌지우지함으로써 그 나라의 경제 위기 극복을 돕기는커녕 어떻게 더 심화시키게 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책의 부록으로 딸려 있는 DVD강연을 통해, 저자는 이 책 [나쁜 사마리안]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해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혹은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무슨 대안이 있는건데?" 라고 묻는 이들을 위해 먼저 쓰여진 책이 바로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는 책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제시하는 대안은 딱 정해진 하나도 아니고 여러 가지 방법론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그 방법론들이 과거에는 없었기에 미래에 새로이 모색해야 하는 것들이 아니라, 지나온 역사를 통해 지금의 선진국들을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실제로 도입했었고 그리하여 실제로 이미 성공적으로 검증했던 모델이라는 점 또한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그저 좀 더 크게 떠들어대는 부류의 목소리와 논리 속에 파묻혀 진짜 역사의 진실을 알아보려 하지 않는 우리들의 게으름, 지나온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우리들의 안이한 타성에 대해 냉철하게 되돌아 볼 것을 요구합니다. 아울러, 현재의 필요 때문에 지난 역사를 부인하고 편리하게 합리화하려는 자세에 대해 좀 더 정직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나쁜 사마리안들이 진정으로 강도를 만나 쓰러진 행인을 도와주고 싶은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면,(설령 '선한 의도' 없이 내심 도움의 댓가로 "잇속"이나 "합당한 보상"을 기대할지라도) 경제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지난 역사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과거를 솔직히 인정할 수만 있다면, 바로 그 역사 속에 실제로 "착한 사마리안"이 될 수 있는 방법과 길이 분명히 있음을 제시합니다.

요컨대ㅡ 저자는 "착한 사마리안"이 되는 방법은 "나쁜 사마리안" 자신들이 지나온 역사, 바로 앞선 선조들의 모습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글을 맺습니다.

끈적한 여름, 꼭 휴가가 아니더라도 하루쯤 시간 내서 읽어 보시지요... 답답했던 도시를 떠나 깊은 숲속에 들어온 듯한 청량감을 맛보실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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