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新 인맥]서울대학교 1970년~80년대 ‘언더서클’

2009 02/17   위클리경향 812호

이명박 정부의 ‘저격수’로 등장

‘언더서클’은 70년대 말~80년대 초 군사독재정권의 학원 탄압이 빚어낸 독특한 대학문화였다. 사진은 1984년 전투경찰이 서울대에 진입, 잔디밭에 배치되어 있는 모습. <경향신문>

촛불시위가 한창이던 2008년. 송기호 변호사는 쇠고기 협상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졌다. 국제통상 전문변호사로서 그의 전문적 지식과 역량에 쇠고기 협상을 주도한 통상관료는 진땀을 뺐고 촛불시위는 전국으로 퍼졌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 역시 MB정부의 ‘저격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는 국제관계학 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하며 정부 당국자들을 몰아붙였다. 정치권에서는 비록 원외지만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는 “미국산 쇠고기 개방정책에 대해 국민투표에 붙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미 FTA협정, 쇠고기 협상 과정은 물론이고 독재시대로 회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이명박 정부에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들을 묶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 대학 시절, 서울대 언더서클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송 변호사(사회대 81학번)와 이 교수(외교학과 81학번)는 ‘농법회’ 소속이고, 심상정 대표는 ‘대문’ 출신이다. 이들은 최근 ‘고소영’ 인맥이 주축인 MB정부의 반민주성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과거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농법학회, 가장 활발한 모임 이어져
(위 왼쪽부터)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 김학규 진보신당 동작 갑 위원장, 박석운 민생민주국민회의 운영위원, 백태웅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법학대학원 교수, 송기호 변호사,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 양길승 전 청와대 부속실장,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이강택 전 PD연합회장, 이선근 경제민주화를위한민생연대 대표, 이진경 서울산업대 사회학과 교수,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 교수,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 진중권 중앙대 독문과 겸임교수, 최민 사회복지법인 ‘너머’ 이사장, 최철국 민주당 의원.
패밀리, 집, 가족, 식구. 80년대 전반 대학사회에서 떠돌던 은어다. 같은 언더서클 멤버라는 뜻이다. ‘언더’는 7, 80년대 군사독재가 만들어놓은 독특한 문화다. 역사와 전통이 깊은 패밀리는 60년대까지 선배세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그리고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의 중심에는 이들 ‘언더서클’이 있었다. ‘언더서클’이 만들어진 경로는 다양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소위 ‘80년 봄’ 이후 군사독재정권의 학원 탄압이다. 공개서클도 ‘유사시’를 대비하여 이중구조, 즉 ‘언더’를 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서울대에선 흔히 ‘5대 패밀리’ ‘8대 패밀리’ 식으로 불린 주류 패밀리들이 존재했다. 패밀리들은 보통 약칭으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과는 사회과학학회의 약칭이며 보통 ‘사과’에서 연상되는 ‘애플(apple)’로 불리기도 했다. 대학문화연구회가 대문→게이트(gate)로 불린 것도 같은 원리다. 농법학회는 농법, 후진국경제연구회는 후경으로 약칭됐다. ‘아카’는 흥사단아카데미를 줄여 부른 이름이다. 벌써 상당한 세월이 흘렀고, 또 ‘언더모임’이다 보니 구성원에 대한 기억은 엇갈렸다. 게다가 당시에도 일부 서클은 구성원 간 서로 같은 모임인지도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한 인사는 “가끔 지나치면서 눈인사만 하는 사이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식구’라고 하더라”고 회상했다. 지속적으로 모임을 한 경우는 그나마 역사나 학번별·기수별 멤버가 정리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농법학회는 그나마 가장 활발하게 모임이 이뤄지고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도 있다. 2004년 봄, 대통령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후, 모임 내에서 일부 회원을 중심으로 ‘심재철 의원 제명’이 거론됐다. 농법회 77학번으로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심 의원만 ‘성토’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었다. 심규철(76학번) 전 의원 역시 제명 대상자로 거론됐다.

‘한사’는 1980년대 초반 최대 패밀리
81학번 4년 후배로 역시 84년 총학생회장을 지낸 이호윤 (나우리서치 이사)의 말.
“아무래도 우리가 학생운동 출신이라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물론 반론도 있었다. 지금 있는 농법학회가 무슨 비밀단체도 아니고, 친목단체인데…. 그래도 기본 정체성은 있지 않냐는 재반론도 오갔다. 결국 심 의원 제명 이야기는 흐지부지됐다.”

농법학회가 배출한 면면을 보면 정체성 이야기가 나올 만하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 최규성 민주당 의원, 이원영 전 의원 등 정치권 인사도 여럿 배출됐다. 법대에서 시작된 학회라 아무래도 법조계에 진출한 사람도 많다. 82년 총학생회장을 지낸 김상준 경희대 NGO대학원 교수, 윤우현 전 민주노총 정책국장(현직 교사), 윤석인 희망제작소 부소장(77학번·전 한겨레신문 경영기획실 이사) 등도 이 학회의 멤버다. 앞에서 거론한 송기호 변호사나 이해영 교수 역시 81학번으로 농법회 회원이다.

아무래도 ‘전통’이 있는 서클이다 보니 요직에 진출한 사람도 많다. 역시 농법학회 회원 출신인 최철국 민주당 의원 측에 따르면 임채진 검찰총장, 권오승 전 공정거래위원장(서울대 법대 교수) 등도 농법학회 선배다.

‘한사’, 한국사회연구회는 80년대 초반 서울대 최대 패밀리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운영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1967년에 만든 ‘한사’는 김승호 사이버 노동대학 대표, 고 김병곤 전 민청련 부의장(71학번), 박석운 민생민주국민회의 운영위원·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73학번), 정의헌 일반노조 공동위원장(74학번) 등 쟁쟁한 전·현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를 배출했다. 멤버 중에는 재계에 나가 있는 사람도 있다. 부윤경 삼성물산 상무(75학번), 김수천 에어부산 대표(75학번) 등이 그들이다.

흥사단 아카데미는 조금 독특한 경로를 밟았다. 연합서클로 70년대까지는 합법적인 등록서클이었지만 80년 5·18사태가 일어나 등록이 취소되면서 언더로 잠적했다. 흥사단 회원이던 윤철호 사회평론 출판사 대표(80학번)는 5·18 이후 지하 점조직식 서클이 되었다고 기억한다. 흥사단 출신으로는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68학번), 양길승 전 청와대 부속실장(69학번), 신철영 전 경실련 사무총장(70학번), 이선근 경제민주화를 위한 민생연대 대표(74학번), 이강택 KBS PD(전 PD협회장) 등이 있다.

‘대문’은 독서회 ‘청넝쿨’이 전신
(위 왼쪽부터) 권오승 전 공정거래위원장, 김대환 전 노동부 장관,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 김상준 경희대 NGO대학원 교수, 김수천 에어부산 대표, 부윤경 삼성물산 상무, 성경륭 전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 신철영 전 경실련 사무총장, 윤석인 희망제작소 부소장, 이호윤 나우리서치 이사, 현무환 전 웅진미디어 대표이사.
물론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 멤버 중에서는 이념적으로 대척점에 서 있는 회원도 있다. 이들은 MB정부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있다. 한나라당 김성식 의원(77학번)이나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가 대표적이다. 홍 이사는 1982년 서울대 사회2계열에 입학한 뒤 흥사단 아카데미에 가입했다. 학생운동으로 제적 위기에 처하자 1983년 정치학과로 재입학했다. 홍 이사는 87년 하반기 서울대 총학생회 사무국장을 지냈다. NL계열 지하운동 활동을 하던 홍 이사는 90년대 중반 이후 공개적으로 사상전향을 선언하고 ‘뉴라이트386’의 기수로 앞장섰다.

‘대문’은 1973년 만든 독서회 ‘청넝쿨’이 전신이다. 김충환 한나라당 의원, 성경륭 전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한림대 교수) 등이 만들었다.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75학번), 심상정 진보신당 공동대표·최민 사회복지법인 ‘너머’ 이사장(78학번), 유강근 변호사(79학번), 황인상·안병용 변호사(80학번) 등이 주요 멤버다. 박종운 한나라당 경기 부천·오정 당협위원장(81학번)은 “원래 학생운동과 거리가 먼 독서클럽이었던 모임에서 최민 등 78학번 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재수를 해서 81년도 사회학과에 들어간 박 위원장은 사회대평론이라는 편집실에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지하그룹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 모임은 박 위원장이 2학년 때 ‘대문’과 일종의 합병을 한다. 박 위원장이 경험한 학습 시스템은 2학년까지는 소위 RP(reproduct)팀이라고 학생운동 인자의 재생산을 담당하고, 3학년 때부터 운동조직에 들어간다. 그와 동기인 백태웅씨(전 서울대 학도호국단장, 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법학대학원 교수)는 법대의 공개 모임인 ‘피데스’ 쪽 후배들을 이끌었는데, ‘대문’은 82년도에 본부서클인 세계문화연구회(세문)를 또 만들었다. 그리고 이쪽에서 최민 등을 중심으로 80년대 학생운동사의 다른 축인 CA그룹이 만들어진다.

82학번에선 신성범 한나라당 의원(전 KBS기자),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 83학번엔 김찬훈 인터넷 법률서비스 예스로 사장 등이 대문의 주요 멤버다. 수배 중이던 박종운씨는 87년 1월, ‘대문’ 84학번인 박종철씨 자취방에서 후배를 만나기도 했다. 나중에 박종철씨가 경찰에 연행돼 “박종운의 거처를 대라”며 물고문을 당했다. 결국 박씨가 사망하고 이 고문치사사건은 1987년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군소 규모의 패밀리도 있다. 김학규 진보신당 동작 갑 위원장은 ‘젠틀맨’이라고 불리던 신사(신식민지사회연구회) 출신이다. 70년대 야학을 주로 하던 대학연합서클인 신사 출신 멤버로 유명한 이는 작곡가 김민기다.

주로 475세대와 386세대가 섞여 있는 언더 패밀리 멤버들이 본격적으로 한국사회의 파워로 등장한 것은 1997년 정권 교체 무렵이다. 국민의정부·참여정부를 거치면서 정치권에 진출하거나 공공기관장을 맡아 활동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법조·관계 인사들 출신 밝히기 꺼려
(위 왼쪽부터) 김성식 한나라당 의원, 김충환 한나라당 의원, 박종운 한나라당 경기 부천·오정 당협위원장, 신성범 한나라당 의원, 심규철 한나라당 전 의원, 임채진 검찰총장,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

보수정권으로 바뀐 지금은 어떨까. ‘후경’ 멤버였던 현무환 전 웅진미디어 대표이사는 “20~30년이 지난 지금 과거와 똑같은 입장일 수 없지만 청년시절 고민의 핵심은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한다.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는 박종운 위원장은 “사실 이명박 정부야말로 보수정권이라기보다는 운동권 정부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과거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현 정부 요처에 두루 진출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민주화뿐 아니라 시장원리를 관철하는 것도 민주화”라며 현재 자신의 활동이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반대편, 즉 구 여권의 입장에 선 사람들은 다소 움츠러드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지금도 서클별로 친목·취미 모임을 갖는 경우는 많지만 법조나 관계에 진출한 경우 ‘오해를 살까봐’ 과거 이념서클 멤버였다는 것을 밝히기 꺼리는 경향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출발점은 서로 달랐지만 언더 패밀리들의 종점은 거의 비슷하다. 대부분 서클은 85학번이 막내다. “서클주의·종파주의를 청산하자”는 운동이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서로 모일 일 없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공안기관의 주목을 받기보다 과나 단대 학생회 단위로 어울리는 것이 자연스러우면서 또한 과학생회 단위로 재편되는 것이 운동 발전의 자연스런 요구였다는 것이다. 이호윤씨는 당시 “서클 해체라는 방향이 옳았다”라고 말하면서도 “지성인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말했다.

현재 이명박 정부의 대척점에 서 있는 ‘서울대 운동권’ 출신 중에는 언더서클이 아닌 공개서클 출신도 적지 않다. MB 정부의 정책사안에 대해 날카로운 논평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진중권 중앙대 독문과 겸임교수는 이진경 서울산업대 사회학과 교수(수유+너머 연구원)과 함께 공개서클 탈반의 멤버였고 같은 ‘공부팀’ 소속이었다. 이 교수는 “개인적으로 공부를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일부에서 머리만 커진다고 안 좋아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지지성원을 받은 편”이라며 “4학년 때는 이른바 D(Demonstration·데모)팀이었는데, 말하자면 데모가 있으면 주동이 아니라 머리를 채워주는 일종의 전투요원”이라고 말했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는 피데스 회장을 맡았지만 백태웅씨가 주도하던 ‘대문’의 멤버는 아니었다. 말하자면 ‘언더서클’ 외곽조직의 책임자였던 셈이다. 조 교수는 “당시에는 반독재민주화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1987년 형식적·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는 다양했던 지향이 드러났고 그중 일부는 전혀 다른 길로 가기도 했다”라며 “돌이켜보면 우리를 버티게 한 힘은 사회과학 공부나 세미나라기보다 당시 양심이나 상식에 반하는 현실과 모순이었던 것 같다”라고 회상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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