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06.05 20:38 http://cafe.daum.net/mindong1990/MnGi/31

    “바보 노무현 대통령님”을 쓰다 앙앙 운다 [2009.06.05 제763호]
    [표지이야기-눈물의 기억]
    서거일 5월23일부터 영결식 29일까지 ‘민장’ 상주들의 다큐 7일
    임인택 임지선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뙤약볕 아래 여고생 흐느낀다. 해거름 중년 남성 들썩이는 어깨 흐릿하고, 새벽 3시 또 다른 울음소리 찬바람에 흔들린다. 다시 땡볕, 운구차 화장길 떠나간다. 곡소리 먼저 타들어간다.

    “슬프다.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다.” 황지우 시인은 ‘뼈아픈 후회’라는 시제로 토로한다. 반도의 근대사에서 사랑을 받았다는 정치인이 단 한 명 있던가. 때론 표를 줄지언정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거나…. 5월의 덕수궁은 뼈아픈 후회들로 그렇게 들썩였고, 결결이 주저앉았다.

    » 5월27일 서울 견지동 조계사 분향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마음을 담은 글이 빼곡히 적힌 천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2009년 5월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봉하마을을 찾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가 말한다. “국민들이 제대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걸 부끄럽게 여기고 미안해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노 전 대통령을 다시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건 반토막 진실이다. 시민들은 유가족의 뜻과도 상관없이, 정부의 원천봉쇄를 뚫고 자신들만의 분향소를 덕수궁 앞에 차린다. 정부 지정 분향소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들이 실상 다시 알게 된 건, 비주류의 죽음으로 연명하는 주류 정치학의 폭력이다. 촛불만 켜지면 ‘잠정적 소요사태’로 규정하고, 상여마저 뒤집을 무자비 정치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분향소를 마련한 덕수궁 일대를, 영결식이 열리기까지 일주일간 배회했다. 회한은 자책에서 슬픔으로, 슬픔은 분노에서 증오로 치올라, 서울 복판은 내내 비등했다. 만나는 이마다 이름은 오열씨요, 분노씨다. 결국 애도문마저 격문과 구호가 되고, 고즈넉한 돌담길 두른 만장이 깃발 되어간다. 그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침묵의 민란이다.

    “조문하며 그분께 마지막으로 전한 메시지가 있습니까?”

    “다음 생에도 꼭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어달라고 말했습니다.”


    5월23일 밤 10시, 다음달 출산 예정인 만삭의 아내(33)를 데리고 온 한 남성(38·경기 고양시)은 한참을 담금질한 외마디를 뱉는다. 눈물을 흘리는 그는 5살 딸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묻고서 온전히 듣고 보기가 힘들다. 기자는 집에 돌아갈 때마다 저들의격정에 감전되듯, 녹초가 되어 쓰러진다. 이레 동안의 민장(民葬)은 그렇게 기록된다.
     

    5월23일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결국 또 그리되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다시금 거리로 불러모았으니, 어쩌면 그가 저승에서도 갚지 못할 신세가 될 모양이다.

    대통령에 당선되던 2002년 겨울,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며 그에게 실망했다던 2003년, 그러나 탄핵은 안 된다며 100만 촛불을 들었던 2004년,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며 끝내 등을 돌리겠다던 2007년, 거리는 언제나 ‘노무현’을 불렀다. 퇴임 뒤 봉하에서도 그리 불러세웠다.

    “지난해 12월 봉하에서 따뜻한 봄날 다시 인사 나오시겠다던 그 말씀 끝으로 정녕 마지막 모습이 되었습니다. (당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많이 울었는데 이렇게 오늘도 많이 울리십니다.”

    대한문 앞 분향소 첫날, 굵은 펜 꾹꾹 눌러 조의록을 채운 맹미란씨에게도 노 전 대통령은 가늠 못할 신세를 진다.

    충격은 헤아릴 수 없다. 정부도, 어느 조직도 충격 대처 요령을 알리거나 위로하지 않는다. 이날 오전 김아무개(44)씨가 “오후 4시, 대한문 앞에서 추모를 위해 모이자”는 제안을 포털 다음의 토론방 아고라에 올린다.

    한예진(18)양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친구가 보내준 휴대전화 문자로 (서거 소식을) 알게 됐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왔다”고 말한다. 자꾸만 흔들린다. 조문을 위해 달려온 최초의 여고생. 160cm가 안 돼 보이는 작은 체구에선 눈물이 쉴 새 없이 맺힌다. “그분 원래 안 좋아했는데…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거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경찰도 일찌감치 대한문 앞마당에 전경 40여 명을 심어뒀다. 도롯가는 전경차로 막았다. 예정했던 분향소는 30분이 지나 차려진다. 대신 경찰은 사방을 에워싸, 대한문 앞으로 추모객들이 진입하는 것을 원천봉쇄한다. 비 오면 어떡하냐며 들여놓으려던 천막은 진입 시도 2분 만에 경찰이 부순다. 서 울던 이들 나앉고, 비명을 지른다. “예우로 모신다며! 조문도 무섭냐, 이 ××들아.” “오늘은 조문만 할게요, 조문만….” 욕도 애원도 젖어 있다.

    오후 6시 남짓, 정동길 쪽은 전경 대신 버스 3대로 틀어막으려 한다. 전경단에 밀려 깔린 한여민(고2)양의 왼쪽 무릎에 핏빛이 든다. 그사이 서울시청역 쪽 전경 한 명이 서거 관련 호외를 읽는다. ‘울지 마라’ 지휘 명령이 없는 한, 그라고 왜 애타지 않고 충격이 없겠는가.

    저녁 7시 남짓, 광화문 방향 출구를 터주기까지 추모객들은 대한문 앞마당에서 병자인 양 격리되었다. 차라리 게토 안에서 자유롭다. 열 발톱에 연두색으로 화장한 젊은 여성도, “한 달 전 아버지의 죽음보다 더 충격적”이라는 40대도, “언론에서 600만달러 어쩌고 의혹을 키워서 노인들은 그게 600억원인 줄 아는 경우가 많다”던 78살 노인도 떨며 꽃 한 송이 놓는다.

    저녁 8시20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더 큰 영정이 도착한다. 달빛 아래, 그림자도 발 디딜 틈 없다. 어느새 10명씩 합동 분향을 한다. 더 크게 웃는 그 앞에서, 시민들은 더 크게 더 많이 운다. 그리 또 신세진다.


    » 시민 분향소가 차려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찰이 조문객 유입까지 원천봉쇄했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 어떡하냐며 분향소 천막을 들이려던 노력도, 경찰이 낚아채 2분 만에 부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5월24일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필부들 맺힌 눈물방울에 2003년 5월25일이 비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진보 진영과의 마찰에 “대통령 못해먹겠다” 말한다. 어쩌면 외로움이었을 테지만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조차 의심한다. “인간 노무현은 믿고 좋아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은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고, “권위주의적으로 변했다”며 탈퇴를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조차 참여정부 때 나선 시위가 가장 많다.

    정확히 6년이 지난다. 대한문을 찾은 한 여성은 “더 믿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말한다. 충격 뒤 자책은 죽순처럼 솟는다. 뿌리가 깊다.

    경기 광명에선 시장이 시민 분향소를 치우라 해 마찰이 일었으나, 그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지못미 신드롬’은 덕수궁을 지나 광주와 대구 시민 분향소도 건너고 봉하에 가닿는다. 덕수궁 돌담길, 서울시청역사, 대한문전 바닥에 가슴 치며 눌러썼을 조의문이 가득하다. 지못미, 지못미, 믿지 못해 미안해요….

    자책은 원망으로 이어진다. 5살 아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덕수궁을 찾은 강아무개(30대·서울 청량리동)씨는 말한다. ”우리나라 국민은 더 당해야 해요. 무능력한 것보단 낫다며 지금 정권을 뽑았잖아요. 그렇게 당하고도 몰라요. 정말 화가 납니다, 제 자신한테도.” 5월23일 오전 내 울었다는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기자 앞에서 펑펑 운다.

    대한문 영정 앞 국화꽃이 수북하다. 자원봉사자들이 추모객에게 나눠준다. 유족 없는 ‘장례’에 이날 하루에만 모인 조의금 400만원이 꽃값이고 물값이다. 분향 첫날, 국화가 부족해 두세 차례 사용되었을 뿐, 5월28일엔 1천만원이 답지한다. 지난해 넘쳐나던 양초의 출처를 캐물었던 이명박 정부는 유족과 협의해, 노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민장으로 결정한다.

     

    5월25일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5월23일부터 매일 이곳을 찾는다는 이들에게 낮·밤 구분이 의미 없다. 북은 핵실험을 전격 강행했다. 산 자들의 ‘인정 투정’, 망자 앞 곡소리보다 크지 못하다.

    대한문은 분향소가 차려진 날부터, 경계란 경계는 모두 흐린 ‘개와 늑대의 시간’ 속에 있다. 낮·밤, 생사, 자책과 분노, 하물며 “<시티홀>의 김선아, 너무 재미있더라”며 조문하러 가는 20대 여성 둘의 폭 큰 감정선까지. 정동영 의원 지지 모임 회원인 이아무개(33·여)씨는 5월27일까지 모두 네 차례 대한문에 들른다. 조문만 두 번을 했다. 그는 “이틀을 안타까워만 하다, 깨고 보니 분노가 치민다”고 말한다. 이념과 지지의 경계도 흐릿하다.

    한밤 추모 행렬이 낮보다 길다. 밤 10시30분께, 서울시의회 입구에서 한쪽 추모 행렬의 끝이 겨우 보인다. 김기연(경기 남양주)씨와 기성태(서울 종로)씨가 양손에 촛불과 국화를 들고 줄 끝에 선다. 한 명은 지난 대선 때 “경제는 책임져줄 거란 생각으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 “뚜껑을 까보니 정말 실망스러웠다”고 하지만, 한 명은 “경제 잣대로만 투표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선진국이 되긴 힘들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쉰 살, 그들은 친구다. 봉하의 자살은 이 사회 ‘쉰 살’이 따르기엔 지나치게 엄격한 순결일지 모른다. 둘은 “그의 죽음이 없었다면, 개인의 성찰이 이렇게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잊고 살던 ‘노무현’과 뒷짐만 지고 보던 ‘이명박’이 되살아난다.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그들은 조금씩 영정 앞으로 다가선다. 한발 두발 성찰 같다. 분향까지 2~3시간은 넘게 걸릴 거라 했더니, 김씨는 “오늘 회사에서 자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5월26일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불 속 회한이 광장의 민장을 통해, 성찰이 되고 바투 공분을 빚어내고 있었다. 서울시청역 지하보도로 이어진 추모 행렬은 맞은편 프레스센터 앞까지 닿는다. 땅 아래에서 국화꽃 들고 또 울고 있다. 지하 공간 인파는 제 몸의 열들로 숨이 막힌다. 6시간을 기다리고 헌화해야, 겨우 위로받을 울분들.

    경찰이 끌고, 정부가 부추기는 꼴이다. 전날까지 서울 전역에 104개 중대, 대한문에만 9개 중대가 배치됐다. 한승수 국무총리는 덕수궁 통제 이유로 소요사태 우려를 든다. 주상용 서울경찰청장은 “차벽이 병풍 같아서 더 아늑하게 느껴진다는 분들도 있다”고 말한다.

    슬픔은 증오로 적분된다. 전날부터 이명박 대통령 탄핵소추안 발의를 위한 서명이 본격화했다. ‘지못미’는 저마다 정치나 소외층에 무심했던 개인적 회한이지만, 증오는 그 틈을 악용한 일방통행 정부를 공식으로 겨눈다.

    한국에서 3년을 산 미국인 영어강사 조지프 리트(25)는 “전직 대통령이 자살한 일은 모든 시민의 큰 슬픔이다. 놀랍고 역사적인 일인데 경찰은 도리어 시민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고 말한다.

    밤 11시20분, 중년 남성 6~7명이 거칠게 내뱉는다. “서울역에 세운 건(정부 공식 분향소) 허깨비여~.” 군데군데 둘러서고 앉은 이들, 시국 토론 중이다. 서울시청역 1번 출구, 커다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이명박 데스노트 - 민주주의, 서민경제, 용산 철거민, 화물연대 노동자 박종태,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리고 ???, 다음은 당신의 이름일지 모릅니다….” 차마 다 읽지 못한다. 원망 말라던 영정 앞에서 자꾸만 싹을 틔우는 원망은 누구의 책임인가.

    » 지난 5월27일, 시민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려던 추모제가 정부에 의해 거부됐다. 대신 정동교회 앞 사거리로 옮겨 자발적 추모제가 진행됐다. 당국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회한이 이들에겐 뒤섞여 있었다. 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5월27일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새벽 2시, 30대 여성 둘이 1시간째 대자보를 쓰고 있다. 38살, 36살 올케 시누이 사이다. 1시간가량 기다려 조문을 마치는데, 누군가 대자보를 부탁했다 한다. “낮에는 국화, 밤에는 촛불로!” “이명박 정권 끝장내자, 5월 정신 계승하여 민주주의 사수하자! 제2의 6월항쟁의 횃불을 들자! 독재 타도!”

    이들은 “집단행동은 애도 기간이 끝나고 해도 괜찮지 않겠냐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며 “나도 이런 표현이 좀 그렇긴 한데, 다른 방식의 애도라고 생각하기로 했다”고 말한다.

    실상 전날 오후부터 많아진 문구들이다. 노조나 시민단체의 플래카드도 는다. 40대 남성은 자유발언을 통해 “울면 끝이냐. 이제 뭐든 바꿔야 하지 않겠냐”고 외친다. “제 마음속에도 비가 내립니다. 사람 사는 세상 만드는 일 우리의 몫으로 알고 끝없는 부패 정권 단죄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조의록엔 ‘고2 김민규’가 적혀 있다.

    하지만 한목소리일 리 없다. 추모가 중반으로 접어들며, 국가 원수에 대한 예우로 대한문을 찾은 이도 상당수다. 무엇보다 김아무개(30·여)씨는 “지난해 ‘촛불’을 들었다 연행이 돼 추모 촛불을 드는 것도 무서웠다”고 말한다.

    늦은 점심을 먹고 줄을 서 헌화하면 이윽고 저녁 허기가 몰려온다. 자원봉사자들이 컵라면을 나눠준다. 아이 손에 쿠키칩을 쥐어준다.

    건장한 택시기사, 새벽 3시가 다 되도록 봉하마을 갈 승객들을 호객한다. 왕복 15만원이다. 김밥을 파는 김아무개(66)씨는 “어제 와서 추모하는데 김밥을 판다는 게 정말 민망했다. 하지만 장사하는 사람들은 또 그렇게 먹고살아야 하지 않냐고 해줘 기운이 났다”고 말한다.

    새벽 5시, 가로등이 꺼진다. 30분가량 지나자 퇴근길 조문이 출근길 조문으로 바뀐다. 네온사인도 하나둘 꺼지고 커다란 해 하나 촉광을 높인다. 위아래 하얀 옷을 걸친 김강석(45·서울 상계동)씨는 안개꽃을 들고 50여 명 줄의 끄트머리에 선다. 남대문시장에서 옷장사를 마친 뒤 꽃집이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오는 길이다. “퇴근길 택시비로 꽃을 샀으니, 이따가는 지하철 타야죠.”

    계속되는 삶, 그것만이 진리다. 하지만 이젠 어떻게? 분노는 폭발할 듯 끓지만, 풀 길을 알지 못한다. 그의 죽음이 ‘짐’처럼 남긴 숙제가 된다.

     

    5월28일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깊은 슬픔, 날선 분노는 구술되기 어렵다. 침묵은 길어지고, 말 대신 눈물로 다진 몇 글자 겨우 시청사, 대한문 앞 광장 바닥에 ‘시’가 되어 붙는다. 첫날부터 겹겹이 붙은 비문들로, 덕수궁 돌담은 거대한 비석이 된다. 13살 아이는 “바보 노무현 대통령님”을 쓰다 앙앙 운다. ‘미안 마라’ 하여 미안하고, ‘원망 마라’ 하여 원망스럽다.

    죽음이 시도 살린다. 일대가 ‘시의 광장’이다. 22살 여대생은 컴퓨터 프린터로 정결하게 글을 추려 덕수궁 돌담길에 붙인다. “무지한 제자들을 위해 몸을 던져 진실을 보여주신 것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저는 공부도 못하고 머리도 좋지 않지만, 적어도 깨어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의 영원한 대통령님, 나의 스승님.”

    “나 좀 치료해주세요. 머리가 텅 빈 것 같아요. 눈물이 계속 나와요, 목이 메어 숨을 쉴 수가 없네요, 가슴이 미어져 답답해요. 많은 조문객들 보면 미소가 나요. 난 요것으로 괴로운데 바보 노통은 천배, 만배 힘들었어도 주변분 걱정하셨네요.”

    5월26일 방송사는 29일까지 예능 프로를 모두 멈추겠다고 발표한다. 온라인 게임 회사는 게임 서비스를 잠시 중단했다. 임채진 검찰총장은 사표를 냈다가 반려된다. 수감 중이던 강금원 회장은 울며 출소해 봉하를 찾는다. 시민들은 그게 자신들 ‘시’의 힘이라곤 생각지 못한다.

    이날 덕수궁 추모 인파는 50만여 명으로 그간 일일 최대치를 이룬다. 50만 시구가 더 붙을지 모른다. “이렇게 가실 줄 알았더라면 제 삶을 그리 탕진하진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살던 것을 리셋하고… 죽어서 당신을 만날 때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살겠습니다.”(유주영) 작은 비석을 세워달란 유언이, 거대한 ‘시의 민란’을 도발한 셈이다.

     

    5월29일 “운명이다.”

    오전 11시5분, 덕수궁에선 시민들끼리 따로 영결식을 연다. 정부가 주재하는 장례식을 거부한 셈이다. 노란 모자와 노란 머플러, 노란 풍선과 노란 종이비행기를 든 사람들로 서울시청 앞은 물든다. 운구차가 덕수궁을 지날 때 “나의 대통령”을 연호하며 울부짖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이다. 불볕에 눈물이 타들어가고, 그도 이미 화장된다. 경복궁에서 서울역을 이글거리는 거대한 민장이다. 공식 영결식 때 이명박 대통령이 등장하자, 덕수궁은 야유로 들썩인다. 곡소리는 ‘반정부’의 다른 말이다.

    시민단체는 전날 서울시청 광장에서 추모제를 열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하지만 5월29일 운구차가 서울을 빠져나간 뒤, 시민 추모객들은 마침내 서울광장 일대를 거대한 촛불로 뒤덮는다. 서거 이후, 사실상 지난해 촛불 정국 이후로도 처음이다. 두 가지가 보인다. 이제 ‘촛불’은 전통적 시민단체가 더는 주도하지 못한다는 것과 앞으로 촛불 또한 그와 무관하게 전망된다는 것이다.

    노제가 끝난 뒤에도 시민들은 대한문전에서 분향을 했다. 49재까지 지속될 참이다. 그때마다 촛불이 불탈지는 알 수 없다. 일주일 동안 100만 명 이상이 덕수궁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아프게 만났다. 시인 허수경은 ‘불취불귀’ 봄의 이별을 노래한다.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잘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보낸 기억만 없다

    하지만 제(祭)란 무릇 죽음과 삶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 이제 그를 놓아보내야 한다. 1980년 5월, 1987년 6월 그리고 또 오늘. 반도의 오뉴월은 분노의 계절이다. 슬픔의 계절이다. 반도의 민주주의는 오뉴월이 만들었다. 이제 연령을 넘고 시대를 넘어, 그 시절 동참했던 모든 이들, 잔인한 정권 앞에 눈물지었던 모든 이들을 ‘오뉴월 세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반도의 내일은 그들 손에 놓였다. 이제 추모는 끝나고 저마다의 ‘촛불’이 남는다. 그에게 바치는 수많은 ‘시’로, 이제 살아남은 자가 어둡고 어지러운 내일을 모색하는 다짐이 된다. 조종 소리 아직 들린다.

    자원봉사자들

    “봉사라도 해야 내가 살겠다”

    » 추모객들의 경향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중학생부터 노년들까지 다양하다. 여고생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상갓집에서 귀한 것은 일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5월23~28일 엿새간 2천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몰렸다. 상황실에서 자원봉사 접수 업무를 담당한 김공헌씨는 “신기하게도 사람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와 자리를 채워주고 있다”고 말했다. 봉사자들은 쓰레기를 정리하는 일부터 분향 절차를 안내하는 일까지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5월27일 덕수궁 돌담길 아래 홀로 말없이 앉아 국화꽃을 나눠주던 노정자씨.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네 살인 노씨는 토요일 아침 뉴스를 듣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봉사라도 해야 내가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날 아침 대한문 앞에 와 분향을 마친 뒤 상황실을 찾았다. “이 늙은 나도 뭔가 도울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국화꽃 나눠주는 일이 주어졌다.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지지했다는 그는 “이승만 때부터 지금까지 봐왔어. 무식한 나도 알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라며 분노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칠순의 나이에 힘들 법도 하련만 그는 “죽은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 일이 뭐가 힘드냐”고 말했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는 바람에 왼손과 왼발이 불편한 문아무개(50)씨는 서울 지하철 시청역 3번 출구 앞에서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5월25일부터 자원봉사에 나섰다. 분향하러 왔다가 시민들에게 물 나눠주는 일을 도왔는데 시민들이 물장수로 오인하자 아예 자원봉사 신청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게 너무 슬프고 분하다”는 그는 한쪽 팔로도 능숙하게 쓰레기를 정리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거 보면서 나도 뭐라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중학교 3학년인 최혜원·김예가·김지수양은 5월27일 자원봉사 활동을 두 차례나 했다. 오전 10시30분까지는 학교에서 쓰레기 줍기 자원봉사를 했다. 그러고는 교복을 입은 채로 대한문으로 향했다. 김지수양이 먼저 친구들에게 “대한문에 분향하러 가자”고 제안하자 두 친구가 따라나섰다.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가지 말라고 했다며 눈치를 봤다. 이들은 분향을 마친 뒤 “자원봉사 하실 분”을 찾는 외침을 듣고 곧장 상황실을 찾았다. 처음엔 조문객들에게 생수를 나눠주다 오후 들어서는 시민들이 접어놓은 종이학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땡볕 아래 앉아서 일을 하면서도 “힘들지 않다”고 했다. 학교에서 한 줄로 서 쓰레기를 줍는 자원봉사보다는 대한문 앞에서 땀 흘리는 게 더 의미 있는 봉사활동이라는 게 이들 삼총사의 생각이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화보

    » 5월29일 오전 11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이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거행됐다. 이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노제가 끝난 뒤 만장을 든 운구 행렬이 서울역으로 향하고 있다. 정용일 기자yongil@hani.co.kr

    » 5월27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시민 추모제가 당국의 불허로 무산돼 정동교회 앞 사거리로 옮겨 진행됐다. 일부 시민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을 앞세우고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경찰력에 막혀 무산됐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 5월2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가 끝난 뒤 시민들이 서울역으로 이동하는 운구 행렬을 보며 “노무현 사랑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 노무현 대통령 서거 6일째인 5월28일 오후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조문하기 위해 온 시민들이 노 전 대통령의 대형 걸개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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