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한 주가 훌쩍 지나버렸다.
속세에 찌들어 묵은 마음의 때를 씻을 수 있을까 하는 약간의 호기심어린 기대를 안고,
마음병에 걸려 두해 넘게 고생하고 계신 아버님을 모시고 계룡산 신원사 아랫 마을의 마음수련원을
찾았던 게 지지난 5월 첫주의 토요일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마음수련원이란 곳을 알게 된 것은, 예전 직장의 사장님으로부터
[가야산으로의 7일간의 초대]라는 책을 한 권 읽어보라고 선물받았던 때였다.
그 때가 2003년이나 2004년쯤 무렵이었을 터이니, 족히 5년은 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내용인즉, 나름 잘 나간다 싶은 저자가 일도매진한 끝에 불과 일주일 만에 우주의 철리를 보고
깨달음에 이르러, 스스로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서 책으로 소개한다는 것이 어렴풋한 기억이다.

그 뒤로도 마음수련원을 다녀온 몇몇 주변인들의 추천으로 늘 어떤 곳이길래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일까 늘 궁금해하던 차에,
어버이날을 낀 황금연휴를 핑계 삼아 그동안의 지적 호기심을 풀기 위한 수련행차에 나선 것이다.

두 해 전 칠순잔치 잘 마치시고 난 뒤, 졸지에 전립선암 초기라는 진단을 받아
전립선 절제 수술을 받으신 뒤로 신경쇠약 증세가 도져서 심신의 기력을 급격히 잃어버리신
아버님을 모신다는 명분 아닌 명분을 덤으로 얹어서...

아버님은 입소일부터 연일 주야로 계속되는 사진 버리기 수련 앞에, 일주일을 겨우 버티셨고,
첫 주 과정이 끝나기가 무섭게 퇴소를 고집하셨다.
할 수 없이 광주의 신경정신과로 진료를 받도록 모셔 안내해 드리고,
난 내친 김에 좀 더 뿌리를 캐보자는 심정으로 수련원의 2과정을 등록하고 한 주를 더 눌러 앉았다.

마음수련원 논산 본원은, 다른 것은 몰라도 자리와 풍광 만큼은 정말 빼어난 곳이다.
동북편으로는 계룡산의 전체 줄기가 병풍처럼 빙 둘러 뒷쪽을 받치고 자리하고,
남쪽 앞편으로는 적당한 평야와 높낮은 구릉이 어울어져 전형적인 임산배수형의 길지로 보인다.

입지야 어찌되었든 솔직히 마음수련의 방법은 내게는 그리 효험이 없었다.
그들의 말마따나 살아온 지난 삶에 대한 나의 진정어린(하늘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요구한다) 참회나
회개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때문일 수도 있겠고,
혹은 그동안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알음알이 지식들이 너무 쓰레기처럼 내 마음을 뒤덮고 있어서
기존 것을 비우지 않아 새로운 것을 채우지 못한 탓일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주야로 아침부터 심야까지 쉬지않고 이어지는 '죽이고 버리기' 명상의 연속 수련 과정에,
몇 번이나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그 자리(수련장)를 벗어나고 싶었고...
2주차 목요일 오후 명상 수련 중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쉬는 시간을 틈타 자리를 떨치고 나와버렸다.

막상 나오긴 했으나 어디로 갈까... 조금 애매했다.
분명 숙소에 남아 있거나 누워 있으면 도움 강사들이 찾아와 미주알 고주알 늘어놓을 게 분명했다.
일단 수련원을 벗어나기로 작정하자, 뒤로 펼쳐진 계룡산 봉우리 병풍이 나를 유혹했다.

날씨는 그지 없이 맑고 화창하고, 하늘은 푸르다.
수련원을 벗어나 걷는 아스팔트 옆 가로에는 초여름 아카시아 꽃향기가 발걸음을 재촉한다.

포장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니 곧바로 신원사 입구...
동학사 입구와는 비교하기가 힘들 정도로 한적한 시골 마을 풍경이다.
버스 종점 정류장 공터 모습이 마치 70년대 새마을운동 시절 같은 느낌을 준다...
좀전에 지나쳐온 논가의, 모란인지 작약인지 화려한 꽃밭과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2천원의 문화재관람 티켓을 끊고 5분쯤 걸어 올라가니, 허름한 신원사 안내표지판에
4천왕상이 모셔진 절 입구가 입을 쩍 벌린다...





이미 시간은 오후 4시를 지나고 있어, 한가하게 절터만 노닐다가 오고 말 수는 없었다.
이왕 내친 발걸음 계룡산 한 봉우리라도 밟고 내려오마고 결심하고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갑사로 넘어가는 고개마루까지는 3킬로가 못되어, 잰 걸음으로 올라가니 두 시간이 채 안걸렸다.
평일에다 늦은 오후인지라, 올라가는 등산객은 혼자 뿐!
내려오는 등산객 달랑 4-5명만 만났을 뿐, 정상에 이르기까지 내내 혼자 묵묵히 걸었다...

정상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께서 살갑게 보온병 뚜껑으로 커피 반 잔을 만들어 선사해 주어서,
잠시 입술을 축이고...

고개마루 서편으로 200미터쯤 위쪽에 자리한 연천봉...
계룡산 여러 봉우리 중에서도 기의 형세가 제일이라는 연천봉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 보았다...
풍수를 모르는 상식인이 보기에도 내리 보이는 지형의 기세가 범상치가 않다...



동북편으로는 아래쪽에서 병풍으로 보였던 계룡산의 연봉들이 줄기줄기 손에 들어올 듯 잡히고,
남서편으로는 넓디 넓은 방죽(저수지) 두 개가 쌍으로 펼쳐지며,
서산 길을 재촉하는 태양 빛을 수면 거울로 받아 눈이 부시게 반사한다.





연천봉 꼭대기에서 뒤늦게 올라온 남도의 풍수집안 후손 등산객 한 분이 연신 가계 조상님들의
탁월했던 예지력과 지관 능력에 대해 쉬지도 않고 자랑처럼 수다를 늘어놓으신다.
6.25 전란을 미리 감지하고 제자들과 더불어 제주도로 피신을 했다는 얘기로부터,
명당 자리는 음덕과 선업을 쌓는 만큼만 하늘이 점지해주는 것이지,
지관의 개인적인 능력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둥....



오랜만에 북한산이 아닌  산에서 굽어보는 산야의 풍광이 무척이나 새로왔다.
결혼 전에 동학사 쪽으로 올라와 본 이래 근 10년만에 두번째 찾는 계룡산행!
한두 컷을 마음 속 추억으로 남겨둔다...

* 혹, 마음수련원에 대해 궁금한 분이 계시다면 그것은 다른 곳에 기회를 만들어 글을 남겨둡지요.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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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7년째인가...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 2003년 딱 요맘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4.19 무렵에 이사를 했던 기억이 어렴풋하니 말이다....

집 앞 남녘편이 바로 앞쪽 동산에 접해 있어서, 사시 사철 베란다 창밖의 풍경이 교차한다는 것이
그나마 이 집의 매력이다.
특히나 이 맘때, 4월초 진달래 개나리 필 즈음이면 어디선가 꼭 딱따구리 한 마리가 찾아와서
이른 아침 잠을 깨워주기를 한두 달 하다가 떠나간다...

어린 시절 만화영화에서나 나옴직한 딱따구리 울음소리와는 많이 틀리다..
"따닥닥닥 "이 아니고, 보통은 "딱따르르륵" 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의성어라는 것이 듣는 사람마다 달리 표현될 수 있는 것인지라 나만 그렇게 듣는 것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도심 한 복판 주택가에서 이런 자연산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도 축복이지 싶다.

아무튼 우리 집앞 동산에 한창이던 진달래 개나리도 이젠 지고,
벚꽃 한 그루 꽃잎도 거진 바람에 날려 지고 있다.

하지만, 벚꽃이 지고 나면 그 위로 아직은 앙상한 아카시아 나무의 푸른 잎이 무성하게 돋고....
5월이 가기 전 진한 아카시아 향기 속으로 딱따구리 소리를 듣게 될 것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어쩌면 저 벚꽃 나무 위 아카시아 끝에 놓여진 둥지 중 하나가 딱따구리의 것은 아닐런지....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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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시험, 시험....
학창시절에 지겹게 들어야 했던 시험 타령을 요즘 초등 6학년 졸업반인 딸아이 하나 둔 죄로,
요즘도 거의 매일 듣기 싫게 들어야 한다...

다만, 그 시험으로 인한 스트레서의 대상자가 내가 아닌 딸아이와 애엄마다.
전국 일제고사야 시험이랄 것도 없으니 무시하기로 치고,
무슨 중학교 입시 테스트가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시험 끝나면 중간고사,
중간고서 끝나면 기말고사, 뭐 이런 식으로 매번 시험타령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매냥 시험 준비한답시고 방구석에만 쳐박혀 있으려 하는 딸아이와 애엄마를 꼬셔서...
어렵사리 선유도 공원으로 나갔다...
봄 가을 철따라 때때로 찾는 공원이건만, 오늘은 두 모녀 완전 고삐에 끌려나온 소마냥
전혀 즐거운 표정이 아니다.

벚꽃 나무엔 어느새 푸릇 푸릇 새 순이 돋기 시작하고,
개나리는 어느새 잎파리들 속에 진노랑 색깔이 시들어간다.
그나마 푸른 새순 위로 붉으스레 부끄러운듯 고운 빛깔을 자랑하는 복사꽃이
어릴 적 아련한 고향 생각과 더불어 왕가휘의 동서서독을 떠올리게 해줄 뿐....

채 한 시간도 채우지 못한 채, 돌아나온 선유도(仙遊島)....
한자 뜻 그대로라면, 예전에는 신선들이 노닐던 섬이란 뜻이련만....
그 때의 신선들께선 예서 무얼 하면서 세상을 즐겼을까....

멀리 성산대교를 등지고 선 버드나무 아래 울타리의 개나리 노오란 꽃가지들도
못내 가는 봄이 아쉬워 한숨진다...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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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 비바람이 적었던 덕분이라...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모두들 짧은 수명을 미리 끊지 않은 드문 해 중의 하나인 듯 싶다.
4주 연속 토요산행 기록 역시 덕분에 세운 오랜만의 기록이 아닌가 싶고...

한 주의 피로가 몰려온 덕분인지, 점심 후 잠시 붙이마던 눈이 떠진 것은 오후하고도 꼬박 4시!
봄의 열기가 다 식기 전에 꽃향기 보고 싶은 덕분인지, 내부간선도로 길이 꽉 매워져버려...
불광동 지나 구기터널 밑에 이르는 데만도 한 시간 가까이....

이미 일행은 앞서 떠난 자리라
혼자서 구기파출소 뒷편 절터 능선을 타고 올라 탕춘대 성곽으로 오른다...
예전 매표소를 조금 지난 옛 절터로 향하는 길로 빠져드니,
지난 가을 추색을 만끽했던 그 골짜기를 다시 만나 이번엔 춘색을 즐긴다...

비봉이 이마 위로 마주 보일 즈음에 좀 더 가니, 옛 절터가 작은 소공원으로 꾸며져 있고...
연신 작은 계단들이 바위 위로 이어진다.
올라보니, 어라 이런 곳에 약수터가 숨어 있을 줄이야...

그래 절터라고 했으니 물줄기 옹달샘터라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짐작이 맞아 즐거웠고
물맛 또한 시원했다.
비봉을 바라다보며 바위 틈 위로 피어난 개나리와 진달래의 조화를 몇 컷 담아내고...
한 달만에 만난 산행 길벗들과 뒷풀이 흥겨운 얘기자락이 봄밤의 향기에 젖는다...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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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또 토요일... 한 주가 훌쩍 지났다.
봄의 일주일은 다른 계절의 일주일보다 훨씬 빠르다.
왜냐고?
꽃이 피었다 지기 때문이다.

일주일새 못보던 꽃몽리가 어느새 활짝 피고,
지난 주에 피었던 꽃오리들은 금새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중턱에 피던 몽오리가 꽃이 잡히고,
꼭대기 가지 끝에도 푸르스름한 기운이 돈다.

남쪽 기슭으로만 피던 꽃이
북녘 골짜기로도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하고,
물가 양지바른 곳에 피던 꽃들이
돌틈 바위 사이에서도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것이 모두 일주일 깜빡 사이에 일어나고
다음 주에 꼭 들러봐야지 하지만, 가보면 그 때는 이미 지고 없다.
그런 게 봄이다!!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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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토요일은 집구석에만 박혀 있기가 못내 아쉽다...
아침을 뭐하다 빈둥대었는지....
아이 영어 공부하는 것을 잠시 봐 주었던가...

점심을 걸치고, 따뜻한 봄 햇살의 유혹을 견디지 못해 등산화 끈을 묶고 길을 나섰다.
어디로 갈까....
잠시 망설이다 이내 핸들을 익숙한 불광동 방향으로 잡고...
은평뉴타운 3지구인가.... 대한민국 건축대상에 빛난다는 힐스테이트 아파트 건설현장 부근에
차를 세워두고, 독바위 앞꼴짝인 정진골짝으로 올라 바로 바위를 탔다...

북한산은 대표적인 바위산이라, 그냥 등산로만 따라가거나,
혹은 초보자를 위한 우회 등산로를 타면 별로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누가 뭐래도 북한산은 바위를 타는 게 제 맛이다.
그러니 걷는 노선도 가능하면 바위를 타고 오르거나,
꼭대기 릿지를 걷는 것이 북한산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첩경이다...

이 날도 혼자서 오르는 길이라...
누구에게 보폭을 맞출 필요도 없고, 꼭 어느 봉우리까지 가야 한다는 목표도 없으니 좋다.
그냥 발길 가는대로 따라 가다 보면 산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세상살이 힘겨움을 잠시 잊는다.

정진골 매표소에서 정상 등산로를 타지 않고 바로 우측으로 나있는 사잇길을 오르면,
발길 자국도 별로 없지만 바로 힐스테이트 공사장을 내려다보면서 오를 수 있는 작은 암벽들이 있다.
생초보 암벽 등반 연습 코스 정도라고 하면 좋을까 싶은데....
바위 사이사이로... 진달래 꽃몽오리들이 개화를 준비하는 모습들이 이쁘다...

그 길을 타고 잠시 오르면 금방 족두리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와 만나게 된다.
굳이 족두리봉을 오르지 않고 그냥 다시 오른쪽 불광동 방면으로 내려오는 코스도 동편 능선 골짜기로
진달래가 한창일 때는 멋진 광경이 연출된다.

아직은 진달래 만개하기에는 이른 철이라, 3분의 1쯤 내려오다가, 오랜만에 길 아닌 길,
등산로 아닌 곳을 삐집고 산 중턱 허리를 가로지르는 비등산로를 타고 다시 정진골 쪽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잡아 보았다.

중간에 만난 바위 틈 이끼들이 겨우내 얼었던 물기를 녹여내리며 봄이 오는 소리를 말없이 들려준다.
따사로운 봄 오후... 오랜 겨울의 냉기를 녹여 바위틈 이끼 무더기를 촉촉이 적시며 흘러내리는 물기가
햇빛에 따사로이 반사된다.

좀 더 길을 헤치고 경사진 바위를 몇 개 지나자, 이게 왠 걸....
끊어진 바위 길 위편으로 소나무 측백나무 가지 위로 길게 얹혀 있는 머루 한 그루 무더기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 시골에서는 이걸 보고는 "땡감"이라 불렀는데, 이리저리 뒤져봐도 아마도 개머루가 맞는듯 싶다.
겨우내 잎은 모두 지고, 열매들만 주렁주렁 남아 있다.
비틀어진 꽈리 가지들 사이로 능청대는 덩어리가 가지런히 뻗어 늘어진 것이
사방으로 4-5가지이다 보니 제법 풍성해 보인다...
꽃을 시샘하는 봄바람이 심해서, 계속 흔들리며 춤추는 열매가지를 찍으려면 초점이 좀처럼 맞지 않는다.

아무튼, 진달래 꽃맞이 봄 산행길에 기대치 않게 걸려든 장면이다....
이런 장면을 향해 셔터를 누를 때마다, 나도 올해는 좋은 카메라를 하나 장만해야겠단 생각이 앞선다....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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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이 내린 산은 늘 나의 마음을 유혹한다.
설 명절을 앞둔 날이라,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할 겸 새벽에 사우나에 가리라 일찌감치 마음을 먹고 잠들었더랬는데, 아침 눈을 뜨고 세수를 하면서 창밖을 보니 사위가 흰 눈이라....

그 희고 차가운 눈이 내 발길을 다시 산으로 유혹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사우나는 산에 다녀와서 해도 충분한 일이니까....

주섬주섬 아침을 챙겨먹기가 무섭게 베낭 하나 달랑 둘러메고 디카 하나만 넣고 집을 나섰다.
버스로 마포구청역에 내려 6호선 지하철을 갈아타고 불광역을 통과, 독바위역에서 내린다.
막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중간 쯤 가는데, 반대편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에 탄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소리친다.

"지금 산에 못 가요, 눈이 많이 와서 입산 통제한대요...."

아뿔사!! 이런 낭패가 있나...  겨울 북한산행이 한두 번이 아니건만, 입산통제로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는 여태껏 한 번도 없었는데...  반신반의... 하지만 어쩌랴... 한두 명도 아니고 떼를 지어 돌아내려오는 데야 괜히 헛걸음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오르던 승강기를 내려 다시 플랫폼으로 내려와 돌아가는 지하철을 기다리자니 영 기분이 개운치를 않다.

웬지 그냥 돌아서기에는 찝찝한 마음.... 혹시 또 모르는 일... 휴대폰을 꺼내들고 114를 눌렀다...
"북한산 국립공원 안내소 좀 부탁합니다..."
"고객님, 북한산 국립공원 안내소 말씀이십니까?  북한산 국립공원 안내소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고객님, 우이동도 있고 종로도 있고 여러 군데인데 어디를 찾으시나요?"
"종로 쪽으로 알려 주세요...."

이어서 연결되는 안내번호 숫자 나열이 채 끝나기도 전에 1번 버튼을 눌렀더니, 안내중이던 번호로 연결된다.
"오늘 입산이 완전히 통제된다는 데 전부 갈 수가 없는 건가요?"
"아, 아침에 대설주의보가 내려 통제했었는데, 좀 전에 해제했습니다. 가셔도 됩니다."

ㅋㅋㅋ  그러면 그렇지.... 이 정도 눈으로 입산이 통제될 리가 없다.
지하철 기다리던 걸음을 바로 되돌려 다시 승강기를 오르기 시작...
독바위역은 출구가 하나 뿐인데, 워낙 지하가 깊어서 승강기만도 4-5번을 올라야 지상으로 나온다.

중간에 아니나 다를까 두세 명의 등산객 무리가 승강기를 올라가는 나를 보더니 걱정스럽게 한 마디 거든다.
"지금 입산 통제되어 못 간다는 데요..."
"아! 방금 전에 해제되었답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새로운 소식을 제일 먼저 접한 아이같은 마음으로 대꾸해 주고는 기분좋게 산으로 향했다.

역쉬... 국립공원측의 입산 통제가 결과적으로는 나의 산행을 호젓하고 번잡스럽지 않도록 도와준 셈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이런 첫 눈 쌓인 설경을 보자고 나름 붐빌만한 경관이었건만,
세밑 귀향길에, 아침 입산통제까지 겹친 덕분인지, 산길에서는 사람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호젓했다.

덕분에, 정진매표소에서 시작해서, 사람 없는 수리봉(족두리봉)을 거쳐, 향로봉을 옆으로 끼고 돌아 비봉에서 사모바위 지나 문수봉 올라 대남문에서 구기파출소에 이르기까지 눈 덮힌 산행길 5시간이 족히 즐거웠던 길....

눈이 있어 즐겁고, 그 눈을 보는 나의 눈이 또한 즐거우니 이 아니 기쁜 일일손가....
눈 있는 이들은 보시라....




Posted by 렛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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